사진 픽사베이

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제일 부러운 사람은 공부 잘하는 친구였다. 가끔 축구나 농구 등 운동 잘하는 친구나, 아주 가끔은 싸움을 잘하는 친구를 부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을 한다. 부잣집 아들! 이젠 엄마 친구 아들(엄친아)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 아빠 아들을 부러워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니 엄친아의 요건에 부자 아빠가 필요 조건이 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결혼을 잘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면, '착하고 예쁘고 능력 있다'는 말보다 '장인이 국회의원이라서 힘이 있다, 장인이 사업을 크게 해서 부자다'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가 이러하다보니 부모들은 기를 쓰고 아이들에게 서포트를 해주려고 한다. 우리 아이가 남들에 비해서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빚을 내어가면서 아이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주려고 한다. 물론 본인들은 다 필요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거리낄 게 없도록, 심지어는 훈육을 하는 선생님마저 갈아치워 버린다. 자신이 조금 더 성공하지 못한 것이 부모님의 서포트가 부족했다는 분노를 잊기 위해, 자신의 서포트가 부족해서 아이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주려고 한다. 둘째를 낳지 않으려는 부모들도 많다. 이유인 즉, 한 아이에게 온전한 서포트, 최고의 서포트를 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성공하는 길이 자신의 능력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회 구조이다보니 당연한 흐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고의 흐름을 살펴봤을 땐 잘못된 생각이 끼어있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서포트를 해준다는 것을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해주는 것, 아이 앞의 장애물을 싹 다 치워주는 것, 아이가 위험을 느낄 만한 요소, 불안을 느낄 만한 요소를 미리미리 치워주는 것, 앞 길을 고속도로로 뻥 뚫어 놓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 최고 부자 이건희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대통령 아들이라도 물론이다.  물론 여건이 좋다면 많은 어려움을 피해 갈 수는 있지만, 친구나 애인 사이의 갈등마저 그런 여건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발달 과정상 필수적으로 겪게 되는 난관들(예를 들어서, 배변 훈련이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등)이야 그저 편하게 해준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서포트를 한다고 해도 발달 과정 자체 혹은 아이의 세상에서 도처에 널려있는 위험을 제거하거나 불안을 모두 없애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한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아이가 항상 만족하게끔 해준다거나 어려움 없이 항상 행복하게끔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아이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자유롭게 이용해서 인간의 기본적 충동과 자기중심적 소망, 다른 한편으로는 양심과 사회의 요구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신 주위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자신의 지적 능력을 이용해 자신과 타인, 사회의 요구가 균형을 이루는 선에서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게끔 양육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미국의 소아정신분석학자 셀마 프레이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불안, 그 자체가 정신 질환이 아니다. 단지 아이가 그 불안을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달려있다. 아이가 불안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다. 하지만 아이가 생활 속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을 알고 있다면 그러한 두려움의 출현에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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