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사연)

재수생입니다.

고3 때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고 등교 거부 등의 무기력증도 심했었어요.

막판에 정신 차리고 스퍼트 내긴 했지만 초반이 무너지니 역부족이었고 원래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재수를 결심했습니다.

학벌 콤플렉스도 한몫했던 거 같아요.

지금은 자취하며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는데, 지난 4월부터 또다시 무기력증 증세가 심해졌습니다.

열등감이나 자책에서 비롯된 우울은 계속 유지해오고 있었으나 이렇게 무기력하진 않았는데, 4월에 몸이 안 좋아 일주일 동안 강제로 휴식을 취하고 나니 정말 모든 열정이 사라지고 공허해졌습니다.

디데이는 줄어만 가고 부모님께 죄책감만 드는데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어요. 다니던 학원마저 끊었습니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 정신과도 방문해봤으나 의사의 냉랭한 반응에 죽고 싶어져서 그 뒤론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제가 쓰레기이고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도저히 침대 밖을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욕구가 사라진 기분이에요. 죽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죽어도 될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이 조금 비참하긴 하겠지만요.

요즘 일과는 거의 잠입니다. 책은 공부 계획이 계속 밀리니 꼴보기도 싫어 치워뒀습니다. 새벽 내내 의미 없는 핸드폰 서핑이나 유튜브를 보고 아침이 되면 잡니다. 그리고 밤에 일어납니다. 밥은 하루에 한 끼, 처음에는 배달음식을 먹었다가 요즘엔 삼각김밥으로 때웁니다.

자취를 그만 하고 본가로 내려가는 것도 집안 사정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럴거면 재수를 아예 포기해야 하는데 해 본 게 공부밖에 없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계속 자고 싶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자고만 싶습니다. 학원 다닐 때는 집에 돌아오면 항상 울었는데 요즘엔 눈물도 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인 거 같아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몰라 이젠 고칠 힘마저 안 납니다.

죽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잡니다. 잠이 안 와도 잡니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는 걸 좋아했는데 차라리 평생 꿈만 꾸고 싶습니다.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 조언을 구할 곳이 없어 여기에라도 몇 자 남겨 봅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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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당숲 정신과 최강록입니다. 현재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 적어주셨는데요, 하루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고 또 식사는 영양가도 부족한 삼각김밥으로 하루 한 끼만 먹고 있다고 하시니 무척 걱정이 됩니다. 우울증의 심각도를 고려할 때 먹기, 자기, 씻기 등의 일상적인 생활관리도 중요하게 보는데요. 고3 때부터 생긴 우울과 무기력 증상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고 점차 스트레스만 가중되어 오다가 이제는 계획대로 행동할 에너지도 전혀 남지 않고 소진(Burn out)이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의지를 새로 다지기 위해 정신과도 가셨는데 의사의 냉랭한 반응에 상처를 입으셨다니 정말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사연자님이 혼자 해결하려 했던 노력 모두가 막히니, 더욱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금까지 누구에게 편안하게 털어놓거나 나누지 못하고 ‘혼자’ 감내하고 이겨내려고 많이 애써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나라 학생들의 스트레스 1순위는 매년 ‘학업’입니다. 모든 대학을 순위로 매기고, 학력을 마치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도 한결같습니다. 재수나 편입을 통해 대학을 바꾼다고 해도 입학하자마자 취업 걱정을 시작하는 상황입니다. 사연자님은 중, 고교 시절부터 대학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오셨겠지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지금 힘을 짜내서 겨우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도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성취에 대한 압박이 생길 것입니다. 지금처럼 방향을 잃고 멈추는 시간들은 언제가 되었든 미래에 반드시 찾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사연자님이 지금 모든 것을 멈추게 된 이 시기가 오히려 삶을 재정비하기 위한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사연을 풀어내면서 사연자님이 무력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다시 삶을 이어가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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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알고 계셔야 하는 것은 에너지가 채워지는 데에는 반드시 시간이 걸리고 이 시간을 스스로에게 충분히 허락하는 ‘관대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비(Self-Compassion)’라는 말을 혹시 들어보셨나요? 최근 자기 자비에 대한 심리학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비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과도한 자기 비난에 빠져드는 대신, 너그럽게 스스로를 이해하고 돌보는 태도’입니다. 고통과 실패를 피해야 하는 사건이 아닌, 인간이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현상으로 수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사연자님은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매우 야박하고 매몰찹니다. 마치 다리를 다쳐 못 걷는 사람에게 당장 일어나 뛰어가라는 식으로 자신을 과하게 탓하거나 몰아세워 온 듯합니다. 사연자님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깎아내리는 표현이나, 학벌 콤플렉스, 열등감, 자책감 등의 단어를 보고 자신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달되었습니다. 아마 열등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사연자님만이 경험하는 고통은 아닐 테지요. 그런데 지금 사연자님에게는 열등감이 가장 큰 독이 되고 있습니다.

 

타인들과의 비교를 통해 나를 부족하게 여기는 감정을 보통 열등감이라고 정의하는데요. 열등감을 토대로 세운 목표는 사실 언제나 위태롭습니다. 더 나아 보이는 타인이 있으면 목표가 그에 맞춰 계속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시간은 지연됩니다.

목표를 현재의 자신에게 맞춘 것이 아닌,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이상, 즉 외부 기준에 맞춰서 세운 것이죠. 따라서 성취감이나 만족감과 같은 보상도 지연됩니다. 목표를 성취하는 경험이 쌓일 때, 이것이 자신감의 토대가 됩니다. 그런데 목표가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높거나 스스로 완벽주의적 태도가 강하면 자신감이 쌓일 수가 없게 됩니다.

목표를 달성하는 때가 올 때까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부족한 느낌을 느껴야만 합니다. 심지어 목표를 달성해도 만족감은 잠깐 들뿐입니다. 다음 목표를 설정하고 비교하면서 또 자신을 ‘부족한 사람’, ‘빨리 성취해야 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고, 잠깐 쉬는 방법도 모르게 됩니다.

 

앞으로는 사연자님께서 ‘내가 밥 제대로 챙겨 먹을 시간이 어딨어, 12시간 공부해도 모자란데.’라는 무리한 엄격함보다는, ‘아, 제대로 밥을 먹을 힘도 없을 만큼 내가 지쳐있었구나.’라는 ‘이해’를 먼저 해주셨으면 합니다. 현재 사연자님 자신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도 천천히 하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몰아세우고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면, ‘잠깐만! 자책하거나 비교할수록 나에게 큰 피해야. 비난하는 시간에 차라리 책상을 정리하자’ 이렇게 의식적으로 비난을 멈추고, 생각의 주의를 다른 행동으로 전환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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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는 장기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2년 이내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보통 단기 목표라고 합니다. 사연자님이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학벌이라는 사회적 기준에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해서는 내적인 기준과 장기적인 삶의 목표를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살면서 어떤 일을 해보고 싶은지, 어떤 곳을 여행하고 싶은지, 어떤 경험은 해보고 죽고 싶은지 등등 사연자님의 흥미나 가치관, 신념을 바탕으로 목표를 세워보세요. 장기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삶을 살지를 정할 때, 삶의 동기와 의욕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모든 욕구가 사라진 상황이지만, 진정으로 휴식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허락하시고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면, 욕구가 다시 느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혼자서 자취하는 생활은 이제는 사연자님에게 해가 되고 있습니다. 환경을 바꿔서 가능한 본가로 들어가시는 것을 권합니다. ‘본가로 내려가게 되면 재수를 아예 포기해야 한다’는 ‘집안 사정상 불가능하다’는 스스로 정한 규율이 오히려 족쇄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가에서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찾을 필요도 있고요. 공부를 포기하는 중요한 결정은 지금 말고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당장은 규칙적이고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바꾸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가족에게 명확하고 솔직하게 알리시면 좋겠습니다. 힘겨운 상황을 용기 내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연자님의 상황이 조금이나마 나아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참고>

박세란. (2016). 자기자비가 타인의 안녕에 대한 관심에 미치는 영향, 인지행동치료, Vol. 16(2), 187-212.

Neff, K. (2011). Self-compassion: Stop being yourself up and leave insecurity behind. London: Hodder & Stoughton Ltd.

Neff, K. Web Site <https://self-compassion.org/>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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