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사연)
저는 주부이고 아이가 있는데 밤마다 아이에게 죄책감이 들고 죽고싶은 생각이 듭니다. 남편과도 남처럼 산지 오래이구요. 이모든것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고 현재로는 정신적으로 너무 무력합니다. 왜이럴까 생각해보니 어릴적부터 가정폭력을 보고자라서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저는 아직도 어린시절 혼자 있던 집에서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가 맞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폭행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술을 드셔서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거든요.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고생은 했을지언정 이렇게 무기력해지진 않았을거 같아요. 그때부터 내가노력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거라는 무력감이 생겼어요. 지금은 이현실은 벗어나고 싶어도 능력이 없고 아이가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커서도 별반 달라진게 없는거 같아요. 남편도 사람해서 결혼한게 아니라 현실의 돌파구가 필요했던거 같아요. 남편은 아버지와 정반대의 성격이고 싸울일도 없지만 대화가 없고 답답합니다. 남편과의 정신적 교류나 대화가 있었다면 그래도 이렇게까지 우울증이 심해지진 않았을거 같아요. 자꾸 원인을 찾다보니 아버지와 남편이 떠오르지만 그들을 원망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것도 없고 제가 할수있는건 제인생을 마감하는 정도인거 같습니다. 항상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싶지 않아서 참고 살았는데 결혼한 제가 죽게 되면 아이에게 피해가 갈 것 같아 이혼을하고 싶습니다.
이 무기력함 우울증 현실을 벗어날수 없을것 같아요. 저는 왜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야만 할까요. 모든이가 이유없이 태어나 살아갈수밖에 없지만 행복했던 적이 없는거 같아요. 이모든게 제선택이 아니라 어쩔수없는 상황에 떠밀리듯 살아온것 같아요.
이런말들도 참 무책임하지만...아이를 저처럼 키우지않을 자신이 없어요. 우울한 엄마밑에서 방치되는 아이가 너무 가엾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당숲 정신과 최강록입니다. 사연 잘 읽어보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자신의 삶을 많이 돌아보고, 원인도 분석하면서 현재 상황을 이해해보려 노력하신 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무력감의 원인이 되는 아버지나 남편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요.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요.
이미 과거 사건이 된 고통을 이해하고 정리한다고 해서 현재가 달라지지 않는 경우는 사실 많습니다. 이를 후회하거나 아쉬워하면서 새로운 가정, 이를테면 ‘그때 이러이러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떠올릴수록 결국 과거는 변화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연자님은 어린 시절부터 참 오랜 시간에 걸쳐 무력감에 압도된 채 살아 오셨습니다.
직접 당한 폭력이든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든 강력한 트라우마가 될 수 있습니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폭력을 당하는 걸 지켜보는 어린 아이가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싶습니다.
가정폭력을 경험하는 분들에게 여러 가지 고통의 잔재가 남는데요. 그중 ‘무력감’은 가장 치유가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은 내 존재가 타인에게 휘둘리고 침범당하는 끔찍한 일인데다, 그럼에도 내 삶을 단 일부라도 좌지우지 할 수 없는 무력한 경험입니다.
단 한 번만 경험해도 충격인데, 폭력이 반복이 되면 점차 내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언제든 훼손될 수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저 가만히 웅크리고 내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숨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전부였을 것입니다.
사연자님이 떠밀리듯 외부환경에 맞춰 살아온 느낌을 갖는 것도, 누군가에게 피해주지 않기 위해 항상 참고 살아 온 것도 사연자님이 정말 원해서는 아니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 선택해왔던 삶의 방식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단단한 땅을 밟고 서는 안정감 하나 없이 얼마나 불안하게 표류하면서 살아 오셨을지..
참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주로 외부의 힘에 좌우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삶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비해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더 크게 고통을 받는다고 합니다.
(로저 브라운, 사회심리학, pp.644-5.)
지금 상황은 그나마 엄마라는 역할 하나로 삶을 붙들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울한 엄마 밑에서 방치되는 아이가 가엽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선하고 좋은 심리적인 유산만 물려주고 싶으실 겁니다.
자신이 받은 폭력의 잔재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변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당장은 사연자님이 삶을 헤쳐나갈 힘도 의욕도 없지만, 사연자님에겐 아직 귀한 자원들이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자신의 삶이 아이한테 미치는 영향력을 알아차리고 있는 점, 그리고 사연자님이 자신의 상태를 다각도로 조망하는 힘이 있는 점,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힘과 역량도 충분히 있습니다.
폭력에 뺏기지 않고 지금까지 보호하고 지켜온 사연자님 내면의 삶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사연자님의 사고방식, 자신과 삶을 대하는 태도,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 등등
이와 같은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유일하게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변화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외부의 힘에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으려면,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키워나가야 합니다.
사연자님께서 무력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아주 작은 통제감을 차츰 차츰 쌓아가실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들의 결과를 책임지는 과정까지, ‘자각’하면서 계속 반복해나가는 것입니다.
거창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단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욕구(Needs)’를 알아차립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면, ‘그럼 오늘은 나를 위해 맛있는 파스타를 사주겠다.’
이렇게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파스타를 맛있게 드세요.
아주 사소하지만 스스로의 욕구를 돌보고, 자발적인 선택을 하고 그 결과까지 확인하는 과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무력함에 압도된 와중에도, 사실 사연자님이 주도적으로 선택해서 움직이는 많은 행동들이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밥을 먹을지 1시간 있다 먹을지, 이 비누를 살지, 저 고기를 살지 이러한 모든 사소한 선택에도 사연자님의 주도적인 자유 의지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자유로운 행동 하나하나를 나의 의지로,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느낌을 기억하고 쌓아가셨으면 합니다.
설령 우리가 당장 감옥에 갇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타인이 침범할 수 없고 내가 오롯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믿기지 않으신다고요?
마지막으로 어떤 실화를 사연자님과 나누고 싶습니다.
1948년, 이디스 본(Edith Bone)이라는 저명한 헝가리 언어학자가 스파이혐의로 헝가리에 체포되었습니다. 거짓자백을 강요당했지만 동조를 거부해서 감옥에서 무려 7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저서 <7년 동안의 고독>에서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냈는지 기록했습니다. 처음 3년은 책이나 필기구가 허용이 안 되었고요. 심할 때는 5개월 간 캄캄한 지하실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환기장치도 없고 바닥엔 배설물이 쌓이고 벽에는 곰팡이로 뒤덮인 곳이었습니다. 정말 끔찍한 상황이지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으시겠어요?
이디스 본 박사는 정신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자 여러 방법을 씁니다.
시를 암송하거나 번역도 하고, 직접 창작도 합니다. 무려 6개 국어를 했던 박사는 자기가 아는 모든 단어를 일일히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잘 아는 지역의 거리를 상상 속에서 산책했습니다. 그렇게 7년 동안 결백을 주장하고 끝까지 버텨내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무력한 상태를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다릅니다. 사람에게는 아주 사소하더라도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사연자님이 혼자서 찾기 힘들고 벅차다면, 전문가를 꼭 만나셔서 함께 작업하기를 바랍니다.
분명 삶의 방향성과 의미가 생기고, 주도권을 찾아가는 여정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앞으로 사연자님께서 방향없이 표류하는 삶이 아닌, 방향키를 잡고 안정적으로 항해하는 일상을 살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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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조언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