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많이 죽이셨나요? – 죽은 식물을 대하는 마음에 관하여
지난겨울, 식물 많이 죽이셨나요? 혹한기가 지나고 살짝 봄바람이 불면, 옷차림새부터 금세 봄을 알아챌 수 있다. 두툼하고 투박하던 외투가 살짝 얇아지고, 어느새 사람들의 얼굴에는 살짝 발그레한 홍조가 돈다. 아무도 모르게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해가 조금 일찍 나오고 회사원들이 퇴근할 때가 되어도 바깥이 밝다.
추위를 이겨낸 우리들의 고생만큼, 혹은 더 식물들도 각자 고군분투했다. 빛이 부족하고, 여름엔 벌컥벌컥 마시던 물도 한동안 참았다. 바람도 너무 차가워 문을 꽁꽁 닫았다. 특히 해가 많은 지역에 사는 아프리카 식물들, 호주 식물들은 ‘생명 유지’ 그 자체가 관건이었다. 예쁜 수형, 잎의 모양 따위는 따질 겨를이 없었다. 열심히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 자체가 그들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없다면 살아남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으로, 없는 바람은 서큘레이터로 만들어주고, 부족한 빛은 식물 등이 추가됨으로써 살만한 환경이 된다.
그럼에도 나는 많이 죽였다. 나에게도 겨울은 너무 가혹한 계절이었기에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식물과 마찬가지로 생존의 문제였다. 식물에게도 나에게도 빛이 필요했다. 하루의 에너지를 그곳에서 얻는 것만 같았다. 또 다시 깊은 우울증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식물 돌보기는 물론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버거웠다. 나를 아침에 깨우고, 먹이고, 씻기고, 활동시키고, 잘 재우는 것, 이 한 줄을 해내는 것이 참으로 매일 버거웠다.
추위에, 관리의 부재에 한파까지 들이닥쳤다. 한참 전에 주문한 베란다에 설치할 온풍기는 기약 없이 전국을 돌며 내 속을 태웠다. 드디어 한파가 가장 심한 날 밤, 온풍기도 없이 식물들은 냉해를 입고 대거 죽어버렸다. 작년 여름, 만개하던 푸르름과 비교하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대량의 죽음이었다. 죽음을 목도하며, 병을 앞세운 나의 방치를 자책하며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도, 위로도 핑계도 되지 않았으니까.
얄궂게도 한파 다음날 온풍기가 도착해서 당장에 설치했지만, 얼어 죽은 식물은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게 중에 목질화(초록 가지가 나무의 거칠고 단단한 재질로 변하는 것)된 나무들은 견뎌주었다.
정말 많이 죽였다. 그 수를 부러 헤아리지도 않았지만, 이제 봄이 되었으니 빈 화분의 수로 대충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날파리처럼 제 머릿속을 윙윙 돌아다닌다. 얼마 전, 뻔뻔하게도 얼어 죽인 아랄리아 작은 모종을 다시 샀다. 이번처럼 작게 사서 두 해나 꽤 크게 키운 소중한 식물이었다. 얼어 죽어버린 꼴이 정말 시체를 보는 것 과 비슷해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럼에도 다시 손을 뻗었다. 누군가는 이런 저에게 무책임하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봄이 왔다. 당연하게도 봄이 왔다. 초록의 것들이 움찔움찔한다. 죽음과 확연히 비견되도록 밝고 빛이 난다. 주춤하던 겨울의 잎들과 태부터 다르다. 아직은 아침저녁 겨울의 그것이 남아있지만, 낮은 봄의 세상이다. 당장 나의 에너지부터 다르다. 모른 척하던 스트레칭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고 있다. 베란다를 봄의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이제야 깨어난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겨우내 웅크리던 아이들을 돌봐 주고, 빈자리에 새 식물들을 적당히 채워 넣어 다시 시작해야 한다. 봄을 준비하며 겨울도 준비한다. 했던 실수를 다시 하면 안 되니까.
* 매주 2회 수, 금요일 글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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