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병든 친구를 바라보며, 아랄리아
여기, 아랄리아라는 식물이 있다. 잎새가 길고, 얇고, 뾰족하며 그것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모양새로 생겼다. 이 친구는 나와 함께 한지 1년 반 정도 되었다. 처음부터 한눈에 반해서 집으로 들이고, 쳐다보고 또 쳐다봤다. 잎새에 갈퀴처럼 나 있는 어느 정도 공격적인 모습에 귀여워서 홀로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난다. 귀여운 아랄리아는 잘 자라지 않았다. 나와 같은 시기에 구입한 사람들의 SNS를 넘어다 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이 친구만의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하고 걱정을 접었다.
걱정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건 분갈이 시즌이었다. 봄, 가을에는 그 사이 많이 자란 식물들이나, 흙이 오래된 식물 등을 분갈이, 흙갈이 해주는 시즌이다. 다른 집 아랄리아 들은 다 한 단계 큰 집으로 이사를 가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초조함을 못 감추고 검색을 시작했다. 식물 생장에 필요한 것들을 점검해보고, 공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친구가 안 클 이유가 없었다. 많은 식물과 살다 보니,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가버렸다. 아랄리아는 어느덧 내 관심의 중심에서 벗어나서 자리 잡은 한 켠에서 물이나 적당히 얻어먹으며 살았다.
식물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레 성장이 빠르거나 키우기 까다로운 식물에 손이 조금 더 가기 마련이다. 혹은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종류의 식물이 생기기도 한다. 이유 없이 애정이 가거나, 키우는 버릇과 키워지는 싸이클이 잘 맞아서 별 탈 없이 멋지게 자라 주는, 한마디로 호흡이 잘 맞는 식물 말이다. 반대로 잘 키워보겠다고 집에 들였는데, 어쩐지 호흡이 잘 안 맞아서, 물을 줘도 계속 머금고만 있거나 혹은 뱉어 내거나 계속 탈만 나는 사고뭉치들도 있다.
그 사이에 호흡이 잘 맞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구역이 생겨난다. 내 경우에는 아랄리아가 그랬다. 남의 집 아랄리아처럼 멋진 나무로 자라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잎을 다 말리고 죽어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인 듯이 무던하고 같은 모양으로 살아갔다. 마치 가짜 나무 같았다.
이사를 가게 됐다. 집 구조도 달라지고, 그러다 보니 새로 구역을 정해주게 되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고 가습기를 틀어 놓은 곳은 고사리와 칼라데아 구역, 직광을 좋아하고 바람을 좋아하는 유칼립투스 등을 베란다에 내놓았다. 선반에도 하나하나 식물들 자리를 잡아주는데, 유독 자리를 못 잡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구역’의 식물이 몇 있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아랄리아가 있었다. 한참을 정리하다가 힘이 들어 작은 스툴에 앉아 한 숨을 넘기는데, 맞은편에 자리를 못 잡은 아랄리아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여다봤다. 뭔가, 뭔가가 있었다. ‘깍지벌레’였다. 참고로 검색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면 당신을 정중히 말리겠다.
솜이 붙은 듯해 보여, 처음에는 ‘곰팡이인가?’ 싶지만 자세히 보면 벌레인 깍지벌레는 아랄리아를 천천히 잠식하고 있었다. 마디마디 깍지벌레를 안고 아랄리아는 견뎌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미련해도 이렇게 미련할 수가 없다. 식물에 문제가 생기면 검색이나 공부를 할 게 아니라 식물을 깊게 들여다보고 흙도 건드려 보고, 잎과 가지 마디마디를 면봉으로 점검해야 한다. 어리석게도 나는 헛물만 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많은 깍지벌레를 면봉으로 다 긁어내고, 약을 뿌려줬다. 이제, 이제야 집에 아랄리아가 들어온 것처럼 세심히 물로 샤워도 시켜주고 영양제도 뿌려줬다.
나에게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친한 친구가 고민을 털어놨다. 들어보니 남들도 많이 하는 고민이었다. 5분 정도 들었을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연설을 하듯이 그 친구에게 방법을 가르쳤다. 분명 가르쳤다. 그건 상담이나 대화가 아니었다. 나는 거만했고, 친구는 아마 절망했을 거다. 그저 들어주고, 깊게 그 고민을 들여다봐 주기만 해도 마음이 풀리는 문제였다. 그러나 어린 나는 세상을 모두 아는 것 같았고, 순진한 친구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일장 연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떠들었는지 목이 칼칼했다. 그리고 그 통증이 마음으로 내려와 앉았다. 내가 남의 인생을 가르치다니. 그 얼마나 뻔뻔하고 건방진 짓인가? 깨달은 내 두 볼은 민망함에 빨갛게 불타올랐다.
제발 그 친구가 내가 조언이랍시고 떠든 말들을 모두 유머로 알고 넘겨줬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그 당시 나에게 필요했던 행동은 그저, 듣고 그 고민을 들여다보면 됐다. 그게 필요한 전부였다. 이후 수다가 많은 나는 단순히 ‘말 많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언제나 노력한다. 그게 나를 위해서도, 그 친구를 위해서도 최선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병들어 시들시들, 그걸 버텨낸 강한 아랄리아를 보며, 멀찍이서 ‘쯧쯧’하며 혀를 차던 나는 다시 실패한 관찰자였다. 어느 집 누구의 아랄리아보다 살아가겠다는 집념이 강한 친구였는데, 나의 부족함으로 순식간에 이도 저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았다.
아픈 사람, 아픈 식물에게도 나는 나의 존재를 중심으로 다가선다. 이건 내가 죽는 날까지 고쳐가야 할 문제이다. 이미 잔뜩 아픈 존재에게 그 아픔의 깊이만 가까이서 바라봐 주고, 해줄 수 있는 행동을 하면 그뿐이다. 나는 지금도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반성했다며 글로 떠들고 있다. 지금도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인생을, 생명을 논하는 자리에서 허공에 떠도는 나의 말들은 공허하다.
** 매주 2회 수, 금요일 글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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