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열심히 알바해서 학비를 벌고 있는 삼엽충 대학생입니다. 이상하게 제 주변은 지독하게 갑질만 하는 프로 갑질러만 있어요.

학교에서도 다 같이 과제를 준비하는 팀플에서도 일이란 일은 제가 다 합니다. 회비가 없는 모임은, 거의 제가 계산하게 되고요.

알바를 할 때도 사장님은 저에게만 늘 막 대하고, 같은 알바끼리도 저를 무시하고, 교대 시간을 지켜주지 않아요.

신기한 건 손님들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저에게는 유독 진상들만 붙어서 조리돌림 당하기 일쑤입니다.

문제는 집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아요. 부모님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지, 저에게 경제적 지원을 거의 안 해주세요. 그러면서 집안일은 다 제가 하고, 집안 행사도 제가 가서 얼굴을 비추죠.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제 관상이나 이름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붙는 건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사진_픽사베이

 

A) 사람이 갑질을 당해도 안타까운데, 삼엽충이 갑질을 당하는 걸 생각해보니 더 가슴이 아프네요.

동시에,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계신 것 같아서 놀랐어요. 사람은 본래 어느 정도의 갑질과 어느 정도의 을질을 하면서 살아가요.

제 예를 들어볼게요. 저는 돈을 쓸 때는 꼼꼼한 편이에요. 제가 구입하고자 하는 물건의 스펙은 어떤지, 다른 물건과 비교도 하고, 가격도 당연히 확인하고, 할인이 가능한지, 할인을 받을 방법이 더 있지는 않은지, AS는 얼마나 되는지를 다 확인하는 편이에요.

이런 제 행동이 매장 직원 분께는 갑질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직원분이 저에게 환자로 오신다면 상황이 좀 달라지겠죠. 환자분은 당연히 자신의 증상이 무엇인지, 경과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치료를 선택할 수 있는지, 각각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모두 확인하시겠죠.

 

즉, 갑질과 을질은 인간관계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이상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현실에서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불균형이죠. 언제나 뭔가 좀 더 아쉬운 사람이 있고, 간절한 사람이 있잖아요. 이런 사람은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어요.

‘아쉬운 사람이 을의 입장이다!’ 이 사실 하나로만 갑질을 당하지는 않아요. 더 중요한 건 그다음 단계죠.

바로 상대방이 ‘이 사람이 나보다 더 간절하구나, 이 사람이 을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자기가 갑임을 확신해야 갑질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씀해주신 갑질들 중에, 팀플이나, 알바 사장님, 손님들로부터 당하는 갑질이 바로 이런 종류죠. 누가 보더라도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잖아요.

고학번이시고, 성적이 필요하시다면 팀플에서는 을일 수밖에 없고, 알바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직장이라면 사장님이 갑일 테고, 손님에게서 돈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 손님이 갑이죠.

이런 경우에는 성적을 얻기 위해서, 알바를 유지하기 위해서 갑질을 참을 수밖에 없게 돼요.

사진_픽사베이

하지만 이런 갑질 말고, 모임비 계산, 같은 알바끼리의 갑질, 부모님의 갑질 등은 조금 다른 종류에요. 이런 상황에서 본인이 무엇이 간절하기에 을의 위치로 가는지 혹시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단정할 수는 없지만, 보통 뿌리가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사랑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는 것이 두려운 거죠.

우리는 사람이고 모든 사람의 사랑을 얻을 수도 없어요. 그러다 보니 미움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이런 부분이 예민한 이유는 성장 과정에서 찾을 수 있어요. 부모님이 대학생인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전혀 하지 않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에요.

이걸 토대로 생각해보면, 본인이 성장하실 때 부모님의 사랑을 얻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어요. 사랑을 받기 어려운 성장 과정을 겪으면, 사랑을 얻으려 과도하게 노력하고, 사랑을 잃는 것을 엄청나게 두려워하게 돼요. 얻기 힘든 거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갑-을의 위치가 애매한 일상생활에서 본인 스스로가 을의 위치로 가게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쉽게 눈치채고 갑질을 할 수 있는 정도로 본인이 을인 것이 티도 나는 것 같고요.

 

물론, 지금 제가 언급한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갑-을의 위치가 애매한 상황에서 이렇게 질문을 본인에게 던져보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무엇이 간절하기에 이렇게 을이 되는 걸까?’

그 질문의 답이 나오면, 그것을 극복을 어떻게 할까 같이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학생 시절에 이런 수학 문제 많이 보셨을 거예요.

‘준오는 사과를 5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람이가 2개의 사과를 먹었습니다. 몇 개가 남았나요?’

뛰어나신 분들은 이 문제를 암산으로 풀 수 있으시죠. 하지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세 문장으로 만들어진 저 문제를 수학적 식으로 바꿔야죠. 이렇게요.

‘5-2=?'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정신적인 고민도 수학을 푸는 것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거예요. 문제 상황을 정리해서 본인에게 맞는 정신적 수식을 만들어보고, 그 수식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만약 틀렸다면, 다시 수식을 만들어보면 되고요.

 

사진_픽셀

한 가지 추가하자면, 갑-을 관계가 명확하다고 해서 갑질을 마냥 당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일단은, 갑-을 관계가 애매한 상황에서 본인이 스스로 을이 되는 경향을 발견하고 멈추신다면, 그다음 갑-을 관계가 명확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선을 긋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돼요.

갑-을 관계가 명확한 상황에서 대응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연습이 더 필요해요.

 

삼엽충이 멸망한 이유는 어류가 번성하면서 다 잡아먹혔기 때문이래요. 만약 삼엽충이 어류로부터 저항할 수 있게 진화했다면, 이런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질문해 주신 삼엽충 학생 분은 훌륭히 진화하셔서 갑질러 어류들 틈에서도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힘내요!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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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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