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열심히 알바해서 학비를 벌고 있는 삼엽충 대학생입니다. 이상하게 제 주변은 지독하게 갑질만 하는 프로 갑질러만 있어요.
학교에서도 다 같이 과제를 준비하는 팀플에서도 일이란 일은 제가 다 합니다. 회비가 없는 모임은, 거의 제가 계산하게 되고요.
알바를 할 때도 사장님은 저에게만 늘 막 대하고, 같은 알바끼리도 저를 무시하고, 교대 시간을 지켜주지 않아요.
신기한 건 손님들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저에게는 유독 진상들만 붙어서 조리돌림 당하기 일쑤입니다.
문제는 집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아요. 부모님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지, 저에게 경제적 지원을 거의 안 해주세요. 그러면서 집안일은 다 제가 하고, 집안 행사도 제가 가서 얼굴을 비추죠.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제 관상이나 이름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붙는 건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A) 사람이 갑질을 당해도 안타까운데, 삼엽충이 갑질을 당하는 걸 생각해보니 더 가슴이 아프네요.
동시에,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계신 것 같아서 놀랐어요. 사람은 본래 어느 정도의 갑질과 어느 정도의 을질을 하면서 살아가요.
제 예를 들어볼게요. 저는 돈을 쓸 때는 꼼꼼한 편이에요. 제가 구입하고자 하는 물건의 스펙은 어떤지, 다른 물건과 비교도 하고, 가격도 당연히 확인하고, 할인이 가능한지, 할인을 받을 방법이 더 있지는 않은지, AS는 얼마나 되는지를 다 확인하는 편이에요.
이런 제 행동이 매장 직원 분께는 갑질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직원분이 저에게 환자로 오신다면 상황이 좀 달라지겠죠. 환자분은 당연히 자신의 증상이 무엇인지, 경과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치료를 선택할 수 있는지, 각각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모두 확인하시겠죠.
즉, 갑질과 을질은 인간관계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이상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현실에서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불균형이죠. 언제나 뭔가 좀 더 아쉬운 사람이 있고, 간절한 사람이 있잖아요. 이런 사람은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어요.
‘아쉬운 사람이 을의 입장이다!’ 이 사실 하나로만 갑질을 당하지는 않아요. 더 중요한 건 그다음 단계죠.
바로 상대방이 ‘이 사람이 나보다 더 간절하구나, 이 사람이 을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자기가 갑임을 확신해야 갑질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씀해주신 갑질들 중에, 팀플이나, 알바 사장님, 손님들로부터 당하는 갑질이 바로 이런 종류죠. 누가 보더라도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잖아요.
고학번이시고, 성적이 필요하시다면 팀플에서는 을일 수밖에 없고, 알바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직장이라면 사장님이 갑일 테고, 손님에게서 돈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 손님이 갑이죠.
이런 경우에는 성적을 얻기 위해서, 알바를 유지하기 위해서 갑질을 참을 수밖에 없게 돼요.
하지만 이런 갑질 말고, 모임비 계산, 같은 알바끼리의 갑질, 부모님의 갑질 등은 조금 다른 종류에요. 이런 상황에서 본인이 무엇이 간절하기에 을의 위치로 가는지 혹시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단정할 수는 없지만, 보통 뿌리가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사랑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는 것이 두려운 거죠.
우리는 사람이고 모든 사람의 사랑을 얻을 수도 없어요. 그러다 보니 미움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이런 부분이 예민한 이유는 성장 과정에서 찾을 수 있어요. 부모님이 대학생인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전혀 하지 않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에요.
이걸 토대로 생각해보면, 본인이 성장하실 때 부모님의 사랑을 얻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어요. 사랑을 받기 어려운 성장 과정을 겪으면, 사랑을 얻으려 과도하게 노력하고, 사랑을 잃는 것을 엄청나게 두려워하게 돼요. 얻기 힘든 거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갑-을의 위치가 애매한 일상생활에서 본인 스스로가 을의 위치로 가게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쉽게 눈치채고 갑질을 할 수 있는 정도로 본인이 을인 것이 티도 나는 것 같고요.
물론, 지금 제가 언급한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갑-을의 위치가 애매한 상황에서 이렇게 질문을 본인에게 던져보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무엇이 간절하기에 이렇게 을이 되는 걸까?’
그 질문의 답이 나오면, 그것을 극복을 어떻게 할까 같이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학생 시절에 이런 수학 문제 많이 보셨을 거예요.
‘준오는 사과를 5개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람이가 2개의 사과를 먹었습니다. 몇 개가 남았나요?’
뛰어나신 분들은 이 문제를 암산으로 풀 수 있으시죠. 하지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세 문장으로 만들어진 저 문제를 수학적 식으로 바꿔야죠. 이렇게요.
‘5-2=?'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정신적인 고민도 수학을 푸는 것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거예요. 문제 상황을 정리해서 본인에게 맞는 정신적 수식을 만들어보고, 그 수식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만약 틀렸다면, 다시 수식을 만들어보면 되고요.
한 가지 추가하자면, 갑-을 관계가 명확하다고 해서 갑질을 마냥 당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일단은, 갑-을 관계가 애매한 상황에서 본인이 스스로 을이 되는 경향을 발견하고 멈추신다면, 그다음 갑-을 관계가 명확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선을 긋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돼요.
갑-을 관계가 명확한 상황에서 대응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연습이 더 필요해요.
삼엽충이 멸망한 이유는 어류가 번성하면서 다 잡아먹혔기 때문이래요. 만약 삼엽충이 어류로부터 저항할 수 있게 진화했다면, 이런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질문해 주신 삼엽충 학생 분은 훌륭히 진화하셔서 갑질러 어류들 틈에서도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힘내요!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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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재옥쌤 짱!"
"정말 도움됩니다. 조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글쓴이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좀더 내면의 에너지를 모으시면 좋겠어요.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하거든요.힘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