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슬슬 대학생활이 지겨워지는 헌내기 H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긴 한데, 신경 쓰이는 게 좀 있어요. 제가 선물을 버리지 못하거든요.

이 선물이라는 게 거창한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뭔가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상대방이 저에게 준 물건은 하나도 버리지 못하겠어요. 중고등학생 때부터 받아온 선물들이 계속 모이기만 하니, 이것도 몇 상자가 되더라고요. 점점 양은 많아지는데, 버리지는 못하겠고...

최근에는 집에 놀러 온 애인에게, 전 애인의 선물을 들켜서 한바탕 싸웠네요. 미련 있냐고. 미련이 있는 건 정말 아닌데, 그냥 선물 버리는 걸 못 하는 건데... 어쩌면 좋을까요? 혹시 뭔가 병이 있는 건 아니겠죠?

 

A) 중고등학생 때부터 받아온 선물이 몇 상자라니, 대단하시네요. 부럽습니다.

정신과 질병 중 수집광(Hoarding disorder)이라는 병이 있기는 해요. 이 병은 실제 가치와 상관없이 소지품을 버리는데 큰 고통을 받는 병이죠. 오래된 신문지, 잡지 같은 온갖 잡동사니를 버리지 못해요.

하지만 병으로 진단하는 정도는, H 씨가 침대에서 현관까지 가려면 선물과 잡동사니의 언덕 사이로 지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는 되어야 해요.

사진_픽사베이

애인이 집에 놀러 와서 전 애인의 선물을 발견하고 싸운 걸로 봤을 때, H 씨는 병적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병적인 정도라면 애인이 집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하거나, 잡동사니가 너무 많아서 전 애인의 선물 같은 건 찾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러니 H 씨가 수집광이 아닌, 일반적인 수준에서 선물을 못 버린다고 가정하고 얘기할게요.

먼저 H 씨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받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선물은 가게에서 생활용품을 사는 것과는 다르죠. 선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가치에 더해서, 나에 대한 상대방의 어떤 생각이 담겨 있는 거니까요.

예를 들면, 친구가 저에게 이어폰을 주면서, “네 왼쪽 이어폰 잘 안 들리더라. 이거 남는 거야.”라고 말했어요. 물질적인 가치만 본다면, 그저 아주 낡은 이어폰이 덜 낡은 이어폰으로 바뀐 거죠. 소리가 조금 더 잘 들릴 거고요.

하지만 이 선물에 고마워하는 이유는, 조금 더 잘 들리게 됐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에요. 친구가 나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그 관심을 표현했다는 사실이 고마운 거죠.

 

다른 사람이 H 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표현했다는 것이 어떻게 느껴지시는지가 궁금해요.

설렁탕이 어떤 사람에게는 소울 푸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악몽 같은 음식을 수도 있으니까요.

H 씨에게는 다른 사람의 관심이 뭔가 독특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죠. 이런 고민을 통해서 선물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떠오를 수도 있고요.

사진_픽사베이

물론 받은 선물을 버리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도 필요해요. 위에서 언급한 수집광의 경우는 물건을 과다하게 모으는 행동보다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행동이 핵심적이거든요.

물론 H 씨는 수집광이 아니지만, 그래도 선물을 버리는 것에 대한 의미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요.

 

앞에서 선물은 물질적인 가치와, 나에 대한 상대방의 어떤 생각이 담긴 거라고 했죠. 따라서 버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물의 물질적인 가치, 즉 이 선물을 언젠가 쓸지도 모르니깐 버리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이 선물에 담긴 다른 가치, 즉 나에 대해 상대방이 가져줬던 관심에 대한 어떤 감정, 혹은 생각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건지, 두 가지 경우로 나눠서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선물을 받는 것의 의미, 버리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H 씨 행동 나름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유를 찾아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죠. 그럴 때를 대비해서 간단히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선물 기록지’를 써 보는 거예요. 빈 공책도 좋고, 한글이나 워드 파일로 적어도 상관없어요. 받은 선물과 날짜를 적고, 선물이 왜 고마웠는지 적고, 선물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로 적는 거예요. 간단하게 한 줄 정도로요.

 

예를 들면 이렇게요.

‘180515 이어폰, 내가 불편한 것을 기억하고 도와줘서 고마움, 활용 가능성 80%’

이렇게 적다 보면, 활용 가능성이 낮은 선물들이나 너무 오래된 선물들이 눈에 띄게 되고 버리기 좀 더 수월해져요.

또 선물을 버리더라도, 그 선물이 가지고 있던 가치를 적어놨기 때문에, 가치 자체를 버리는 느낌은 덜 들죠.

 

이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저도 선물을 꽤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었나 봐요. 덕분에 저도 제가 받은 선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네요. 질문자 분도 제 글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애인과도 화해 잘 하시고요!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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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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