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정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위키미디어 공용

 

BLACK BOX WARNING 이라는 것을 들어 보셨나요? 이는 의료현장에서 처방되는 약들 중 주의를 요하는 것들에 대해 미국 FDA에서 주의사항에 반드시 기입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그 중 BLACK BOX WARNING은 가장 심각한 종류의 주의사항에 해당합니다. 정신과 약물 중에는 대표적으로 ‘항우울제’ 종류에 BLACK BOX WARNING을 기입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항우울제의 투약은 어린이, 청소년, 젊은 나이의 성인(24세 미만)에게 투약 시 위약(Placebo) 투여에 비해 자살사고(Suicidal ideation) 및 자살 시도의 빈도의 높일 수 있다."

 

주의사항 안에는 그 외에도 25세 이상의 성인에서는 자살사고 및 행동이 유의미하게 감소했다는 연구결과, 우울증 자체가 자살 위험성을 높이므로 소아나 청소년에게 항우울제 투약을 계획할 경우 투약으로 인한 이득과 위험성을 잘 고려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처방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투약 안내문에 위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걱정이 될까요? 약의 효과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살에 대한 생각이나 행동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그보다 무서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FDA에서 위의 주의사항을 안내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항우울제의 처방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하는데요, 그 후 항우울제와 자살의 연관성에 대해 어떤 연구들이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주의 사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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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A에서는 2003년 paroxetine 이라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 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에 대한 위약대조시험(Placebo-controlled trial)에서 paroxetine 복용 시 위약 군에 비해 치료 초기에 자살에 대한 생각이나 시도의 빈도가 2배 높았다는 결과가 보고되자 모든 항우울제에 위와 같은 주의사항을 적용토록 했습니다. 이후 이 주의 사항의 진위여부 확인 및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연구들(주로 추적 연구들)이 성인 및 소아를 대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성인, 특히 25세 이상 성인의 항우울제 복용은 자살의 위험성과 두드러지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항우울제 복용 초기에는 자살사고 및 행동, 자살로 인한 사망의 비율이 복용 전 혹은 복용하지 않은 사람들과 유사하였고, 충분 기간(수개월 이상) 복용 시에는 그 비율이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BLACK BOX WARNING에도 안내가 되어 있는데, 이는 우울증상이 약물 투약으로 인해 치료 효과를 나타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연구 결과들을 모아 보았을 때, 성인의 경우 기존 우울증의 심각성, 동반 질환의 유무와 관계없이 항우울제 복용으로 인해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라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문 의료진에 의한 환자에 대한 평가 및 투약이 이루어진다면 안전하게 우울증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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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소아 및 청소년의 경우에는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연구들에서는 투약으로 인해 자살률이 줄어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연구들에서는 투약여부와 자살률은 차이가 없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주의사항과 마찬가지로 자살률이 높아졌다고 이야기를 하는 연구들도 있습니다. 미국의 NIH(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에서도 소아의 항우울제 투약에 관한 연구 내용들은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이에 유의하여 투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인지한다면 소아 및 청소년도 안전한 우울증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째, 정말로 약물 치료가 필요한 상황인지에 대한 전문적인 진단이 필요합니다. 소아의 우울 증상은 성인과 많이 다르고 비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가족 관계 및 주위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약물치료가 필요한 상황인지, 혹은 환경 개선 등의 조정이 필요한 상황인지에 대해 전문가와 상의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정신치료, 혹은 인지행동치료 역시 우울증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전문가와의 상의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약물 치료가 필요한 경우 과량 복용은 피해야 합니다. 적정 용량을 넘긴 정도의 항우울제 투약은 더 높은 자살률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는 만큼 투약의 용량에 신경 써야 하며, 특히 환자 및 보호자는 전문의와 상의 되지 않은 임의의 용량 조절은 절대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항우울제로 인한 자살률에 대한 우려는 치료 초기(3개월에서 6개월 이내)로 국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약물치료 초기에 불안, 초조, 불면, 자살사고, 이상행동 등이 증가할 경우에는 반드시 주치의와 상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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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성에 대해 경고는 하고 있지만, FDA에서 참고한 연구 결과에서 실제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없었으며 이후 진행된 연구들에서도 항우울제 복용으로 인한 자살 사망의 빈도는 매우 낮았다고 합니다. 아직 소아에서의 항우울제 투약에 대한 안정성이 명확하지 않은 데에는 자살의 빈도가 너무 낮아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것 역시 한 몫을 한다고 해요.

 

항우울제 투약을 시작한 환자들의 자살사고 및 시도의 비율이 가장 높은 시기는 투약 1개월 전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주목할 만 합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에서도 언급되듯 소아, 청소년의 우울증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남 몰래 심해지던 우울증이 자살 시도 등의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치료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소아에서의 자살률 악화는 병이 오랫동안 곪아온 것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미국, 영국 등에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우울증 검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뭐라해도 우울증에 빠졌을 때 자살의 위험성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치료받지 않은 채 병을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성인은 물론 소아, 청소년도 전문의와의 상의를 통해 적절히 우울증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는 길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스스로가 우울하다고 느끼며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혼자서 고민을 하기보단 꼭 도움을 받아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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