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읽어주는 영화, 열일곱 번째 이야기

[정신의학신문 : 의정부 성모사랑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유길상 전문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파블로 피카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들 중 한 명이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그의 대표작인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자화상 등은 눈에 익숙할 것이다. 고흐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친숙한 소재, 따뜻한 색채, 두터운 터치에서 묻어나오는 온화한 느낌 때문이다. 빈센트는 평온해 보이는 그의 대표작들과는 대조적으로 굴곡진 삶을 살다 37살의 나이에 요절한다.

 

사진_러빙 빈센트 (수입: 퍼스트런 / 배급: 판시네마)

 

최근 개봉한 영화, 러빙 빈센트는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영화계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는 고흐의 많은 편지를 전달해 주었던 집배원의 아들 아르망 룰랭이 고흐의 죽음에 관한 의혹을 추적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르망 룰랭은 고흐가 생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아를, 파리, 오베르를 방문하고 그와 함께 지냈던 여러 사람들과 만나서 깊은 대화를 한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고흐가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한 이유를 하나씩 밝혀간다.

 

아르망 룰랭이 고흐 죽음 후에 행한 일련의 과정은 심리적 부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심리적 부검은 정신과 전문의를 포함한 전문 검사관이 죽음을 초래한 심리적 요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검사관은 고인의 의무기록, 다이어리, 유서 등의 문서를 파악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 심층면접을 시행한다. 조사 항목에는 학력, 소득 수준, 대인 관계의 패턴, 우울증 등의 정신과 병력도 포함된다. 심리적 부검으로 어떤 심리적 특성에 처한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서 자살을 시도하는지를 파악한다. 핀란드는 1980년대 세계 자살률 1~2위 국가였으나 자살 예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심리적 부검을 도입하여 20여년 만에 자살률을 절반으로 낮추었다.

 

사진_러빙 빈센트 (수입: 퍼스트런 / 배급: 판시네마)

 

고흐 죽음의 원인을 한 가지로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부모는 사산한 아이의 이름을 빈센트에게 붙여 주었다. 빈센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만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어머니는 줄곧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고흐는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아 전도사가 되었고 아버지는 전도사가 된 아들을 외면했다. 1888년, 고흐는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지만 고갱은 이내 그를 떠났다. 동생 테오로부터 오랫동안 후원을 받았던 고흐는 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인생 초기의 부적절한 애착 관계와 대인 관계에서 반복된 거절 경험, 경제적인 부담이 빈센트의 자살을 초래했을 수 있다.

 

현대의 의사들은 고흐가 정신 질환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스토(Henri Gastaut)는 발작, 발작 중 보이는 충동적인 행동, 발작 사이에 나타나는 주기적인 기분 변화, 환각 증상 등을 토대로 측두엽 간질(temporal lobe epilepsy)의 진단명을 내렸다. 고흐는 발작 후 찾아온 우울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자살을 했을 수 있다. 그의 여동생이 조현병을 진단 받은 사실, 그리고 삽화적인 형태의 정신병적 증상 등은 조현병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불안정한 기분,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고갱과 이별 후 귓불을 자르는 등의 자해 행동 등을 이유로 고흐가 경계선 인격 장애를 앓았다고 주장한다. 측두엽 간질, 조현병, 인격 장애 이외에도 양극성 장애, 신경 매독, 알코올 사용 장애 등의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사진_러빙 빈센트 (수입: 퍼스트런 / 배급: 판시네마)

 

고흐가 사망한 후 100여년이 흐른 지금,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천문학적인 액수에 거래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는 단 한편의 그림만 판매되었다. 영화 속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마르그리트가 아르망에게 당신은 그의 죽음은 그토록 궁금해 하면서 그의 삶은 얼마나 알고 있냐고 반문하는 장면이다. 현대 정신의학은 정신 병리에 집착하느라 정작 환자의 삶은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 말고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던 고흐, 그의 작품을 통해 힘든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 또한 위로 받길 바란다.

 

 

유길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성모사랑 정신건강의학과
가톨릭중앙의료원 수련의, 전공의
(전) 포천시 정신건강증진센터 자문의
(전) 의정부 청소년 쉼터 상담의
대한정신건강재단 해피마인드 상담의, 대기업, 보건소 등에서 다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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