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에 대한 낙인과 편견4

[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에 대한 낙인과 편견>>

(1) <정신과는 기록에 남나요?>

(2) <정신과 환자는 보험 가입이 안되나요?>

(3) <정신과 약 먹으면 멍해지고 바보가 된대요>

 

(4) <정신과와 사회적 낙인>

 

낙인(Stigma)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찌른다(sting)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바늘로 찔러 새기는 문신이나 흉터자국은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전과자나 노비에게 낙인을 찍는 형벌의 일종으로 사용되었다. 낙형은 쇠를 달구어 몸을 지져서 대역죄인이나 노비의 죄를 벌할 때 사용되였고, 조선시대에는 자자형(刺字刑)이라 하여 신체의 특정 부위에 먹물로 글씨를 새겨 넣어 전과자임을 알리며 수치심을 갖도록 하는 형벌이 시행되었다.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별은 경면형(黥面刑)이라 하여 “경을 칠 놈”이라는 욕이 여기서 유래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처럼 얼굴에 직접 지워지지 않는 문신을 새겨 넣는 잔인한 형벌은 이제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러나 낙인이라는 이름의 차별과 멸시는 여전히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소외 받은 이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다. 피부에 박힌 먹물 자국이 없다 뿐, 이웃들의 차가운 눈초리와 외면의 눈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그 눈총과 비난의 목소리들이 수치심과 서러움으로 내면화 된다.

 

정신과 환자들에게 사회가 눌러 새기는 낙인에는 ‘정신병’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감이 깃들어 있다. ‘미친 사람’ ‘나약한 사람’이라는 혐오감은 정신질환이라는 ‘질환’을 더 이상 병이라기보다는, 멀리하고 격리해야할 분리수거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환자 각 개인의 인격과 가치는 ‘정신과 다닌대’ ‘정신과약 먹는대’라는 몰이해로 낙인 찍혀 같은 색깔 같은 무늬의 죄수복처럼 구겨진다. 비록 정신과 환자들을 꽁꽁 묶어 화형에 처하고, 굿을 하고, 쇠사슬로 묶어두던 시대는 지나갔다 하더라도, 여전히 환자들에게 쏟아지는 무언의 비난들은 쇠사슬 못지 않은 무거움으로 그들을 옭아매고 있다. 정신질환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은 제도의 개선만으로는 쉽게 뽑혀나가지 않는 깊은 뿌리를 사회 깊숙한 곳에서부터 뻗치고 있다.

 

어떠한 대상에 대한 혐오감이나 불쾌감은 심리학적으로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한다고 알려져 있다. 첫째로 그 대상이 주체에게 손해나 피해를 미칠 위험이 있는 경우에 대상은 혐오를 유발할 수 있다. 가까운 예로 징그럽고 끔찍한 벌레는 그것이 주체를 물거나 위해를 가한다는 사실이 진화적으로 학습되어 본능적인 혐오감을 일으킨다. 전염성 질환에 대한 불쾌감도 같은 맥락에서 나에게 병이 옮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혐오의 감정으로 전환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의 인식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양상의 거부감이 깃들어 있다. ‘정신과 환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은 곧 ‘나에게 위해를 끼칠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으로 옮겨 붙게 되기 때문이다. 지하철이나 기차역 등에서 한번 쯤은 보았을 심한 정신증 환자들의 모습이 남긴 강렬한 인상이나, 뉴스에서 방영되는 정신질환자들의 엽기적인 범죄 기사들이 이러한 불안감을 부채질한다. 증폭된 불안감은 ‘정신과’라는 타이틀에 엉겨붙어 ‘정신과 환자는 피해야 할 대상’이라는 정신질환에 대한 단편적인 혐오감으로 해소된다.

그러나 사실 정신과 환자들의 범죄율과 위험성이 높다는 것은 이미 통계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근거가 없음이 많이 밝혀져 있다. 정신과 환자들의 범죄율이 일반인들의 범죄율에 비해 유의하게 높지 않으며, 공격성을 갖는 환자들의 경우는 급성 상태에 있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정상적인 치료를 받을 경우에 일부 환자들의 공격성과 충동성 역시 충분히 조절될 수 있음이 밝혀져 있다. 누군가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피해를 입힐 대상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오해를 불식시킨다 하더라도 정신질환에 대한 거부감은 쉽게 씻겨나가질 않는다. 혐오의 대상은 단순히 그것이 잠재적 위험이기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거부감과 불쾌감의 두 번째 이유는 보다 심층적인 영역에서 기인한다. 어떠한 대상이 혐오감을 일으키는 이유는 그 대상이 주체로 하여금 억압하고 있던 내면의 두려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자기 문제를 외면화 시키고 있는 대상을 보았을 때 발생하는 적개심이 혐오감으로 전환된다는 이야기이다. 풀리지 않은 마음 속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의식 주체는 그 갈등을 무의식의 심연으로 억압시킨다. 억압되어 드러나지 않는 갈등은 표면적으로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은 끊임없이 의식과 상호작용하며 자아를 주조한다. 무의식 속 잊혀진 불편한 갈등을 자극하는 외부의 객체는 주체로 하여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걱정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연상이 주는 불쾌감이 객체에 대한 혐오감으로 투사되고 만다. 해결되지 못한 자기문제는 상대방의 문제로 떠넘겨지고 그에 대한 비난으로 소화된다. 정신과 환자들에 대한 사회의 뿌리 깊은 혐오감에도 역시 이 불편한 진실은 자리 잡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에 걸쳐 철학자들이 꿰뚫어 보았듯, 인간 의식은 존재의 이원론(二元論)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해왔다. 문자가 확립되기 이전부터도 인류는 영혼의 존재를 믿고, 육체의 죽음과 병마를 뛰어넘는 의식의 우월성을 직감했다. 모든 변수와 조건만 알면 미래를 100%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이 만연하던 시절에도 인간의 사고와 감정은 영혼의 영역으로 떠넘겨졌다. 요컨대, 신체의 영역은 기계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의식의 영역은 고차원적이고 월등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이다. 팔 다리, 오장육부의 부상과 병마를 정신의 병듦과 차별화하는 시선의 시발점도 바로 이곳에서 기인하고 있다. 정신질환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인본적 실패, 영혼의 좌절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좌절된 영혼의 슬픔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환자들을 바라보며 우리들은 무의식 중의 불편감을 경험한다. 알 수 없는 혐오감이 꿈틀댄다. 우리들이 극복하지 못한 좌절된 욕망과 갈등이 빚어낸 적개심이 투사된다. 마음의 평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환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스스로의 현기증이 위안을 받는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갈등을 끌어안고 있다는 불편감에 대한 위안을 찾아 화살을 바깥으로 돌리고 만다. 정신질환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은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갈등 탓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니체는 ‘신체가 가장 큰 이성’이라고 이야기했다. 의학적으로도 정신질환의 상당부분은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 세포-분자적 이상을 동반한다는 것이 잘 밝혀져 있다. 우울이나 불안, 사고장애 등은 질병이고 치료해야할 대상이지 어떤 고차원적인 무언가의 실패나 타락이 아니다.

정신질환은 그 자체로 누군가를 해치게 하지 않는다. 정신질환은 영혼과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과 환자들은 보살핌 받고 관심 받아야할 괴로운 이들이며, 질책과 멸시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이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없듯, 우리 모두 정신건강에 있어서도 역시 각자가 해결하지 못한 아픈 부분을 조금씩 감추고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씁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영혼은 마치 이데아의 영역, 피안의 어딘가에 자리 잡은 고결한 의식인양 끊임없이 갈고 닦고 절제해야할 것만을 강요하는 사회는 피로하다. 그 피로감은 되려 고결하지 못한 갈등들, 풀리지 않는 매듭을 누적시킨다. 그리고 그 억압된 피로감과 적개심이 투사되는 혐오의 심리학에 빗대어 보건대,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과 편견이야말로 그 복잡하게 엉킨 매듭을 스스로 들춰 보이고 있지 않나 싶다.

반복하여 말하건대 정신 질환과 환자들은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정신과 환자들의 가슴에 새겨진 뼈아픈 낙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을 눈물 짓게 하고 있다. 정신과 환자들에게 던져지는 우리의 차가운 시선에서 이제는 우리들 스스로가, 미성숙한 문화 의식의 해결 지어지지 못한 갈등을 돌이켜 보아야할 것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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