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초등학교 시절 만들기 실습을 할 때면 종종 플라스틱 눈알이 있었다. 남는 눈알들은 천덕꾸러기들의 장난감이 되곤 했다. 뭐가 그리 재미났던지 사방팔방에 눈알을 붙이며 깔깔댔다. 전봇대에도, 필통에도, 칠판에도, 친구의 등에도, 눈알 두개만 붙이면 마치 그 물체가 인격을 가지고 살아나는 것 같았다.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어떤 화백은 벽화로 용을 그렸는데, 마지막에 눈알을 찍으니 용이 하늘로 솟구쳤다고 한다. 그 당시 가지고 놀던 플라스틱 눈알들도 어쩌면 만물에 화룡점정을 찍어 주는 마법의 도구처럼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도 중요한 영화적 도구로 플라스틱 눈알이 등장한다. 공식 홍보물에도 플라스틱 눈알만 가득 그려진 포스터가 있다. 그 정도로 이 영화에서 가짜 눈알은 매우 중요한 상징물이다. 

영화 도입부부터 남편 웨이먼드는 집안 곳곳에 장난 삼아 눈알을 붙여 둔다. 그 뒤로도 조금씩 영화 내내 이모저모를 장식하던 눈알은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 에블린의 이마에 안착한다. 영화에서 플라스틱 눈알은 무의미한 가짜에서 진실된 존재의 공명을 추출해 내는 훌륭한 매개체가 된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사람의 뇌에는 눈, 코, 입의 인식을 담당하는 영역이 있다. 관자놀이 깊숙한 쪽에 위치해 있는데, 방추상회(Fusiform gyrus)라는 이 영역은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서 친밀과 위협을 구분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역이 단순히 사람한테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형의 얼굴을 볼 때도, 장난감의 얼굴을 볼 때도 방추상회가 활성화된다. 

아니, 사실 방추상회는 눈, 코, 입만 보이면 반응한다. 스마일 표시처럼 동그란 원에 점 두개와 선 하나만 그려져 있어도 바로 얼굴이라고 인식한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만 봐도 눈매가 날카로운 사람이 떠오른다. 맨홀 뚜껑의 구멍들을 보아도 얼굴이 연상된다. 그 어떤 물건이라 할지라도 방추상회가 얼굴을 찾아내는 순간, 그것은 곧 의인화된다. '대상(Object)'에 '인격'이 부여된다. 

플라스틱 눈알이 마법을 발휘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방추상회가 작동할 때에, 우리는 비록 가짜 눈알이라도 그것과 눈을 마주칠 수 있다.

 

영화 속 악당 조부 투바키는 무한대의 평행우주를 동시에 경험하면서 허무의 화신이 되었다. 모든 존재가 될 수 있어 더 이상 상상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기에, 존재함이란 곧 무의미함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꼈던 세계는 돌멩이가 된 평행우주였다. 돌멩이는 아무것도 없는 절벽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한다. 무의미함과 존재함이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돌멩이의 즉자적 세계에서 허무의 화신 조부 투바키는 힐링한다. 

하지만 조부 투바키와 달리, 에블린은 무한대의 우주를 경험하면서도 무한번 거듭하여 딸을 향해 다가간다. 무수한 평행우주들을 일순에 관통하는 중력처럼, 에블린은 조이를 향해 무수히 많은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 힘이 돌멩이 평행우주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플라스틱 눈알이 등장한다. 돌멩이에 플라스틱 눈알 모형이 달라붙는다. 

그 순간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무척 흥미롭다. 눈알이 붙자마자 돌멩이가 갑자기 무슨 캐릭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절벽으로 떨어지는 돌멩이의 플라스틱 눈알에서 관객들은 모성애 맺힌 애절한 눈빛을 본다. 그 놀라운 순간은 무의미한 객체에 인격이 부여되는 순간이며, 관객들의 뇌 속 방추상회에 불이 켜지는 순간이다. 아무리 플라스틱 가짜 눈알이라 하더라도 눈을 마주친 순간 그것은 그냥 돌멩이가 아니다. 무의미한 돌멩이 두 개가 무의미한 눈알을 달자, 애틋한 엄마와 딸로 변신한다.

 

사진_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사진_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정신분석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조부 투바키는 자기애적이다. 자기애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자기(Self)에 대한 정체감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정체감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들을 도구적으로 활용한다. 직위나 재산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본인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다소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자기애적인 이들은 사람을 사람으로만 보지 못한다. 인격을 가진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자기 내면의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대상 중 하나로 인식한다.

이는 실제로 연구를 통해 관찰된 바도 있다. 자기애적 특성을 가진 환자들은 얼굴 사진을 볼 때, 방추상회에서 발생되는 특정한 뇌파가 확연히 약해져 있음이 관찰된 바 있다(M. Mück et al, 2020). 또 자기애적 환자들의 뇌 MRI를 조사한 연구에서는 방추상회의 회색질(신경세포체)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져 있다는 것을 관찰한 바도 있었다(IgorNenadic et al, 2015).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상대와 사람 대 사람으로 공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구는 결국 도구일 뿐, 자기감을 만들어 줄 수 없다. 효용이 조금이라도 바래는 순간, 무의미한 객체일 뿐임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결국은 텅 비어 버린 자기를 다시 확인하며 공허감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다. 

조부 투바키가 허무에 빠진 것도 결국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자기를 경험하다 보니,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녀에게 인격과 사람, 대상이 의미를 가질 리 만무하다. 모두 자기 파괴에 바쳐질 제물이자 도구에 불과하다. 그녀가 그렇게 된 연유 또한 엄마에게 도구적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자못 서글프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건 그녀에게 사랑과 증오 따위는 결국 무수히 많은 평행우주 속에 반복되는 티끌들에 불과하다. 결국은 '부질없다'는 결론, 공(空)으로 귀결한다. 한바퀴 빙글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가운데는 뻥 뚫려 버린 베이글의 원형이 상징하는 바 역시 그것일지 모른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부로 이어집니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총기 원장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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