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10년 가까이 서비스직에서 판매원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 하고 싶은 게 없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제 적성이나 흥미에 맞지 않는데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내향적이라 타인과 어울리는 걸 힘들어하고, 예민한 성격입니다. 그래도 계속 보는 사람들이 아닌 손님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라 그나마 괜찮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가끔 오는 무례한 손님들 때문인데요. 반말을 하거나, 이모라는 호칭을 쓰거나, 짜증이나 화를 내는 등 무례한 언행을 보이면 너무 화가 납니다.

분노, 모욕감, 억울함, 불쾌함이 느껴지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당신 딸뻘인데 내가 왜 이모야? 왜 말을 저렇게 하지? 왜 저런 행동을 하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세계가 있고 그 기준은 다르니, 내가 예의를 당연하게 생각해도 그들은 아닐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는 아는데 가슴은 아, 진짜 당연한 건데 왜 저러나 싶어 너무 불쾌합니다.

남들은 10년 정도 일했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려보내라고 하는데… 저는 아무리 이런 상황을 반복해도 흘려보내는 게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손님이 화를 내며 물건을 던진다면, 얼굴이 굳고 말투도 딱딱해집니다. 최대한 ‘화’라는 감정을 억압하는데도 수동공격하게 되고(불친절함), 감정이 얼굴에서 드러나 버립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표현을 안 하고 참냐? 그건 아닙니다. 남들은 그냥 “네네.” 하고 넘기는데 저는 “고객님이 잘못하신 부분이지,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라고 한다거나, “고객님, 왜 화를 내시나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느 정도 말을 했는데도, 감정을 억압한 채로 속 시원하게 말을 다 하지 못한 건지 집에 가면 반추하게 됩니다. 그 손님과 할 말 다 해 가며 싸우는 파국화적인 상상도 하고, 내 자존감이 낮은 탓인가? 저 사람은 그냥 자기 스타일대로 말한 건데, 내 트라우마(과거에 쌓여온 진상 경험)를 건드려서 내가 더 화가 난건가? 이런 자책도 하게 됩니다.

남들은 그냥 “네네.” 하며 잘 넘기는데, 10년이나 서비스직 일을 한 저는 왜 늘 같은 부분(무례함)에서 상처를 받을까요. 익숙해지지가 않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멘탈이 약한지, 회복탄력성도 없고, 자존감과 자신감은 더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흘러 넘겨라.”,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지 마라.”,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2차 상처를 주지 마라.” 이런 말들을 많이 들어 왔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분노만 차오릅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타인의 말에 덜 상처받을 수 있을까요? 타인을 고칠 수는 없으니, 저를 고쳐야 하는 게 맞는 걸까요? 자존감, 자신감을 높이고 뭐 그런….

아니면 타고난 기질이 예민하고 내향적이니 직업을 바꿔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만 이런 제 상태로는 사무직에서 일해도 상사의 말에 상처받고, 힘들어할 것 같아서 꼭 고치고 싶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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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연자님께서 올려 주신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10년 넘게 서비스직 판매원으로 일해 오셨다고 하니 그 고충이 상당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더군다나 내향적이고 예민한 성격에 사연자님의 적성이나 흥미에도 맞지 않다고 하시니 직업적인 만족감도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무리 10년 넘게 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고,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일이라고 해도 상대가 무례하게 행동한다면 감정이 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적 반응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적으로 일하는 자리에서 상대에게 똑같이 무례하게 굴거나 화를 그대로 돌려 줄 수도 없으니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크실 테고요.

또 사연자님께서는 내심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고객이 무례하게 굴어도 나처럼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한 건가?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하지?’, ‘나도 감정이 크게 동요되지 않았으면 싶은데….’처럼 주변 동료들의 반응과 비교하며 더욱 움츠러드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동료 분들조차 고객의 무례한 행동에 때때로 상처받기도 하고,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똑같이 무례한 상황을 겪고도 사람마다 생각하거나 느끼는 감정, 반응하거나 대응하는 행동에 있어서는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나 색깔이 어찌 같을 수가 있을까요. 다른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러니 그럴 때마다 사연자님께 드는 생각이나 느껴지는 감정은 이상할 것도, 고쳐야 할 것도 없는, 사연자님 감정의 자연스러운 반응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사연자님께서 분노나 모욕감, 억울함과 불쾌감 등의 부정적 감정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어?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지지?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사연자님의 감정을 부정할수록 그런 감정은 더욱 선명해지고, 억압하려 할수록 자꾸만 튀어 오르려는 것이 감정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비록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어떠한 감정이 느껴질 때는, 사연자님의 감정을 잠시 온전히 느껴 보고 그 감정의 정당성을 스스로 인정해 주세요. ‘저 손님이 저렇게 이야기하니까 정말 불쾌하네.’, ‘저렇게 무례하게 구는데 화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지.’처럼 말이죠. 

 

다만, 사연자님께서 업무를 하는 상황에서 고객과 똑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상대방을 자극하거나 불필요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므로 주의가 요구됩니다. 고객이 무례하게 구는 행동은 사연자님께서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거나,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나, 욕구불만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으로 상대방의 무례한 언행으로 인해 생겨나는 부정적인 파장이 사연자님의 내면으로 흡수되지 않도록 상대와 나의 감정을 분리하려는 노력은 필요해 보입니다. 

즉, 상대가 감정 조절 능력이 미숙하거나 자신의 욕구불만을 애먼 사람에게 풀려 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사연자님을 향한 상대의 감정 분출이 사연자님 개인을 향한 비난이나 공격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결핍된 부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전보다는 감정적으로 덜 동요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사연자님께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예민하고 내향적인 성격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러한 성향의 특성상 아마도 상대방의 미세한 표정 변화나 비언어적인 표현까지 감지하다 보니 신경 쓰이는 부분이나 피로도가 쌓이는 부분이 좀 더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따라서 하루 중 업무에 대한 피로도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사연자님만의 방법을 찾아서 따로 시간을 가진다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업무 시작 전에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편안한 음악을 듣는다든지, 퇴근 후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거나 요가 혹은 스트레칭을 하면서 긴장된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식으로, 감정적 노동으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주기적으로 해소해 주는 사연자님만의 방법을 찾아서 실천해 보는 것이죠.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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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으로 이러한 사연자님의 섬세함을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강점으로 활용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고객의 표정이나 비언어적인 표현을 잘 관찰해서 유독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고객에게는 처음부터 좀 더 친절하게 다가가는 것이죠. 사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화가 나거나 불만이 있는 고객에게 화가 난 태도나 잘못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무례한 고객에게 화가 나는 것은 감정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감정이 태도가 되어 버린 고객과 비슷한 방식으로 무례한 고객을 응대하는 것은, 서로의 분노 감정을 증폭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따라서, 무례하거나 화를 내는 고객 앞에서 똑같이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을 때, 고객의 감정적 반응이나 사연자님의 감정적 불쾌감도 줄어들고, 고객을 응대할 때의 주도권도 좀 더 사연자님에게로 넘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객을 상대한 후에는 상사나 동료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단 5분이라도 감정을 환기하고 가라앉힐 만한 시간을 가지시기를 권유드립니다. 그 시간 동안 호흡을 가다듬고, 다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고 보듬어 주세요.

또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 차분히 그날의 일과 감정을 차근차근 떠올리고 복기하면서 생각과 감정을 정리해 보세요. 단순히 억울하고 화난다는 감정을 곱씹기보다 사연자님의 분노나 슬픔, 수치심 등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감정을 지그시 바라보고 충분히 느낀 후에 흘려보내는 식으로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소화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겁니다. 

그런 후에 다음에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이성적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고, 필요하다면 노트에 정리해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또, 가능하다면 사연자님께서 정리한 대응법이나 멘트 등을 한번 거울을 보고 직접 연습해 보세요. 그렇게 감정적인 고객을 침착하게 상대하는 노하우를 하나씩 쌓아 간다면, 무례한 고객 앞에서도 이전보다 덜 당황하게 되고, 감정을 많이 다치지 않고도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기술이 향상되리라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까다롭고 공격적인 고객을 다루는 일은 여전히 감정적으로 힘들고 고된 일일 것입니다. 고객의 요구에 매번 귀를 기울이고, 감정이 태도가 되는 고객을 응대하는 것이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서비스직에 오래 종사한 베테랑이라 해도 ‘물건을 던지는 고객’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에게까지 웃으며 친절하게 응대할 수 있는 직원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정도로 이성을 잃거나 인격을 모독하는 등 선을 과하게 넘는 고객에게는 당연히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 사연자님은 물론 다른 고객들의 인권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맞는 처사일 것입니다. 욕을 하는 고객이 있다면 녹음을 시작한다고 공지하고 녹취하거나, 공권력의 도움을 받아 정당방위를 행사하시면 될 것입니다.

지금껏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직종에 10년 동안 꾸준히 종사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연자님께서는 참으로 멋지고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만큼 성실하고 인내심이 강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사연자님께서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말은 어불성설이 아닐까요. 사람을 상대하는 고되고 까다로운 서비스직을 10년 가까이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례한 고객을 상대하는 일이 심적으로 너무 부담되거나 힘드시다면, 전문가와의 면담을 통해 좀 더 심도 있는 상담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사연자님께서 평소 관심이 있거나 흥미를 가졌던 일, 적성에 맞는 일을 보물을 찾는다는 심정으로 조금씩 발견해 나가 보세요. 지금껏 별다른 취미가 없으셨다면, 꼭 직업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취미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도 풀고, 새로운 적성을 찾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좋아하지도 않는 서비스직을 10년 가까이 성실하게 임해 오신 사연자님이라면, 자신의 흥미나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다면 더 큰 발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져 보셔도 좋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내면을 좀 더 다져 나가는 훈련을 통해 타인의 말에 덜 상처받고, 더 행복해지는 사연자님의 삶을 꾸려 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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