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짜증 나는 고객에게는 웃으며 응대했는데 퇴근해서 가족에게는 별 것 아닌 일로 신경질을 낸 경험, 누구나 있다. 하루 종일 직장 상사와 동료들의 감정 상태를 살펴 가며 일하다가 퇴근할 때쯤 되면 정작 사랑하는 배우자의 감정을 챙겨줄 만한 에너지는 남아 있지 않을 때도 많다. 회사에서는 항상 긍정적이던 워킹맘이 퇴근했더니 초등학생 아들이 숙제 해 놓지 않았다며 문제집으로 머리를 때린 뒤 “나는 나쁜 엄마인가 봐요.”하고 상담받으러 오기도 온다.

이런 현상을 두고 부정적 감정의 스필 오버(spill-over)가 일어났다고 한다. 감정 노동을 하며 억눌렀던 부정적 정서가 집에 와서 겉으로 흘러넘친 것이다.

 

자기가 실제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정서표현규칙(emotion display rule)에 따라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 “감정 노동을 하고 있다”라고 정의한다.

정서표현규칙에 따라 인위적으로 표정이나 태도를 만들어내는 것을 표면 행동(surface acting)이라고 한다. 진짜 감정은 우울인데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쓴 것 같은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사진_픽사베이

 

감정 노동은 건강, 특히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한다. 한 연구 기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감정 노동자의 34.8%가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보고 되기도 했다. 이러한 수치는 일반 국민의 자살 충동 경험 비율 16.4%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감정 노동이 치명적인 이유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감정의 고유한 기능을 왜곡하고 심지어 억압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감정 노동자는 감정이 갖는 신호 기능을 포기해야만 한다. 분노를 드러내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야 하는 순간에도 꾹 참아야만 한다.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고객을 우선하라는 지시에 따르다 보면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고 모욕하는 사람에게조차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요구받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궁극적으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 벌칙처럼 따라오게 온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나는 이렇게 하찮은 존재인가?”하고 회의하게 되고, 끝내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처럼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감정의 억압과 왜곡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왜곡된다.

 

때로는 감정 노동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교육 과정 자체가 감정의 고유한 기능을 조작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든다.

감정 노동자의 스트레스를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 중에 하나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이다. 직원들이 마인드 컨트롤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데, 이때 분노 조절 훈련이나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기 암시,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훈련 등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배양시키는 교육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런 교육은 감정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이 ‘상처 받을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보다, 외부에서 주입되는 교육을 통해서 또 다른 감정을 느끼도록 조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화가 나고 억울해도 속으로 꾹 참아야 하는 것도 감정 노동이고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밝은 표정을 지어라.”라고 하는 것도 감정 노동이다.

사실 인간이 항상 낙관적이고 긍정적일 수는 없다. 머릿속에서 걱정과 염려가 떠나지 않는 게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인데, 어떻게 항상 기분 좋을 수 있겠는가. 즐거운 있더라도 긍정적인 감정 상태는 대체로 20분 정도 지속되다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계속해서 긍정적인 감정을 유지하려면 어떻게든 애를 써야 하고, 떠나지 않는 걱정 때문에 불안한데도 출근해서는 밝은 표정을 지으려면 정신적인 에너지를 끊임없이 태워내야 한다.

분노, 억울함, 모욕감 같은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고, 인위적으로 긍정적인 표정을 계속 유지하다 보면 정서 탈진에 빠진다. 감정을 억압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아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태워내야 하니까, 감정 노동자는 소진 증후군에도 잘 걸린다.

소진 증후군이 심해지면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지?’라며 일에 대한 회의감이 강해진다. 적성에도 잘 맞고 좋아하는 일이 분명한데도 지금 하고 있는 가치 없게 느껴진다. 나중에는 ‘나는 이 정도 가치밖에 없는 사람인가!’ 하며 정체성마저 부정당한 느낌이 벌칙처럼 따라붙는다.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낀 사건의 충격은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간다. “한두 달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든지 “왜 아직도 그 생각에서 못 벗어나!”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경험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감정 노동의 상처가 치유되려면 충분한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렇다고 감정이 치유될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라는 건 아니다. 아팠던 감정의 기억에 빠져 허우적대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수다도 떨고, 연인과 손을 잡고 영화도 보고,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숲길을 산책하고, 위안이 되는 음악을 몰입해서 듣는 체험이 필요하다. 이런 긍정적 체험들이 쌓여야 감정 노동의 상처도 아문다.

 

감정 노동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걸 삶의 서사(life narrative)라고 한다. 비록 고객에게 막말을 들었지만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라고 일에 대한 자기 나름의 목적을 되새겨 보는 것이다. “100달러 지폐를 구겨 놓는다고 해서, 100달러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라고 자존감을 올릴 수 있는 문장을 되뇌어도 좋다.

 

사진_픽사베이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단순하지 않고, 단순하게 만들 수도 없다. 복잡함은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내면적 복잡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마음이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회사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나는 그래도 자식 농사는 잘 지었어.”라고 할 수 있고, 직장 상사에게 욕을 먹어도, “그 상사와 회식 자리에서는 잘 어울려서 놀아.”라고 쿨하게 생각할 수 었어야 하며, 애인과 헤어져도 “네가 없어져도 만날 사람 많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와 직장 상사가 나를 배신하고, 연인이 떠나더라도 나를 지킬 수 있는 내 안의 다양한 자기 개념을 복잡할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어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수 직함을 가진 한 남자가, 집에서도 교수 역할 놀이에만 빠져서 자녀와 아내를 가르치려고만 하고, 다른 취미 생활도 없이 휴일에도 연구실에만 콕 박혀 있다면 자기 복합성이 낮은 거다.

반면에 어떤 중년 여성이 ‘나는 좋은 엄마다’라는 자기 개념에만 의존하지 않고, ‘나는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고, 피아노를 칠 줄 알고, 성당 구역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남편보다 산을 더 잘 탄다.’라고 자신에 대해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우울증도 안 걸리고 빈둥지 증후군 때문에 괴로울 일도 없어진다.

한 가지가 아니라, 삶의 여러 요소로부터 끊임없이 자기를 살찌우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어야, 마음 건강도 지킬 수 있다.

 

한 가지 자기상(self image)에만 자기를 지나치게 동일시하고 다른 것들을 제외시키고 살아간다면, 배만 뽈록 나오고 팔다리는 근육 하나 없이 가늘어진 몸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직장, 비즈니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한두 가지에만 올인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주식만 분산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에너지도 다양한 자기 개념들에 골고루 나누어 쏟아부어 두어야 한다.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