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정신 중독
외로움에 술을 마시는 주부, 키친 드링커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04.02 08:03

[정신의학신문 :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P님의 사연) 

술이 친구예요. 마음이 허전하고 우울할 때마다 한 잔 두 잔씩 마셨어요. 밤에 남편이 늦게 들어오고, 잠도 오지 않으면 술이라도 마셔서 잠이 왔어요. 그게 지금은 소주 한 병, 두 병이 되었고요. 남편이 술을 끊으라고 하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고, 술 마시고 주사를 하는 것도 아니에요.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나는 날이 많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할 일도 특별히 없는데, 일찍 일어나서 뭐 하겠어요. 새벽에 일어나면 마음만 더 외롭고 힘들어요.

3년 전에 애들 다 유학 보내고, 남편과 둘만 이 큰 집에 덩그러니 내버려진 것 같았어요. 남편은 지금도 바쁘지만, 그때는 더 심했어요. 출장이다 뭐다 해서, 외박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렇게 집에 혼자 있으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어요. 허전하고, 불안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너무너무 싫었어요. 그때부터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했어요. 낮에도 마셔요. 오후쯤 되면 가슴이 아려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도 드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어요. 그렇다고 바쁜 남편한테 전화할 수도 없고, 아이들 공부하는데 방해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때부터 술이 내 친구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참 성실한 사람이에요. 뭐든 열심히 하지요. 직장에서도 잘 나갔는데,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 지금은 큰 사업으로 커졌어요. 별로 흠잡을 것은 없는데, 남편이 좀 둔해요. 사람이 힘든지도 말해야 알고, 힘든지, 아픈지도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눈치껏 표정 보고 좀 알아주면 좋은데…. 어떤 때는 말해도 몰라요. 위로라고 하는데,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요. 곰이에요, 곰.

저도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을 졸업했어요. 남편만큼은 아니라도, 저도 사회생활했으면 어느 정도 성공했을 겁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남편 뒷바라지, 아이들 공부 가르치고 유학 보내고. 우리 가족은 나만 빼고 다 잘 풀렸지요. 나만 바보 된 거예요. 텅 빈 집에 혼자 있으면, 다들 나만 버려놓고 어디론가 떠나간 것 같아요. 그게 무서워요, 나만 버려진 것 같은 느낌… 술을 마시면 그나마 덜 외로운 것 같고, 덜 불안하고, 가슴이 좀 편안해져요.

이렇게 나를 위로해 주는 술을 어떻게 끊어요. 남편은, 그동안은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저녁에 술 냄새 풍기는 꼴 보기 싫다면서 제발 술 좀 끊으라고 해요. 그동안은 뭐 하다가, 이제 와서 내 입에서 술 냄새가 싫다고 술을 끊으라고 하는데, 남편의 이 말이 더 싫고 미워요. 내 마음이 어떤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는 남편은 하나도 몰라요. 내가 왜 술을 마시는지, 전혀 몰라요. 곰 같은 남자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알겠어요. 이제 와서 술 끊으라고 잔소리하는 남편이 너무 밉고 화가 나요. 마치 자기만 잘난 사람이어서, 나한테 훈계하고 가르치는 것 같아 더 기분 나빠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남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나한테 고마운 마음도, 미안한 마음도 없는 거예요. 화가 나요. 그래서, 남편 보란 듯이 더 술을 마셔요.
 

사진_픽셀

 

<키친 드링커>

P는 키친 드링커(Kitchen Drinker)다. 아이들은 외국으로 모두 유학 보내고, 남편은 사업으로 바빠서 집을 자주 비운다. 아무도 없는 넓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외로움과 소외감을 부엌에 숨겨둔 소주 한잔으로 푼다. 하루에 소주 한두 병씩 마신 지 벌써 3년째다. P에게는 술이 친구다. P의 외로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술 밖에 없다.

술을 마시는 여성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40-50대 여성 알코올 중독 환자가 2010년 기준으로 과거 5년에 비해 25%나 증가했다고 한다. 주부 알코올 중독은 단순히 '술'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키친 드링커는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과 이루지 못한 꿈으로 인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술을 마신다.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모두 가지고 있다.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마음, 외로움을 술로 달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P와 같은 키친 드링커를 알코올 중독자라고 함부로 쉽게 부르는 것은, 그녀의 가슴에 또 다른 상처를 안겨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외로움, 공허함. 이것들을 가슴에서 몰아내고 싶어서 술로 가슴을 적시는 것이 아닐까? 가족이 있는데, 외로움을 느낀다면 마음은 더 아플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은 술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괴로운 감정을 쫓아내기 위해 술을 마시기도 한다. 남자는 술을 많이 마셔서 우울증에 빠지지만, 여자는 우울증 때문에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별다른 이유 없이 습관이 되어서 이제는 술을 끊기 힘들다는 사람도 있고, 술이 하루를 고생한 자기 자신에게 주는 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분하고, 억울해서 마시기도 하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잠재우기 위해서 마신다고 한다. 어떤 고통이 그들을 괴롭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맨 정신에 살아가기가 힘들어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셔야만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술을 마셔서 뇌를 마비시키지 않으면, 세상 사는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외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해진다. 게다가, ‘이 사람의 가족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또 얼마나 힘들어할까’를 생각하면 마음은 더더욱 무거워진다.

술은 중추신경계를 억제한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잠시 동안은 긴장이 풀리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생각과 기분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약해져서,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P를 보면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 Lautrec)의 작품, <숙취(Hangover)> 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의 초상화로도 알려져 있고, 드링커 (Drinker)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항상 아름다울 수는 없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때로는 역설적으로 재현하는 화가였다. 그는 감수성 깊은 묘사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숙취 /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반쯤 비어 있는 와인 병과 아직 비워지지 않은 와인 잔을 앞에 두고 여인이 혼자 앉아 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앉아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눈빛은 공허하다. 우울하기보다는 공허하고, 불안하기보다는 무력한 느낌이 든다.

그녀의 내면에 흐르는 외로운 감정은 화폭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노란색과 보라색 배경이 보는 이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여인이 입은 옷의 흰색은, 약해진 그녀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병에 담긴 와인의 빛깔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붉은 빛깔의 와인이, 외로워서 힘겹게 사그라드는 마음을 다시 태워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림의 주인공 발라동은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이 술이라도 곁에 없었다면 무너져 내릴까 봐 두려워서 술을 마신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무력한 삶의 고단함을 씻어 버리려면, 반 병의 와인마저 모두 비워내야 할 것 같다.

 

발라동의 시선은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향하고 있다. 그녀는 와인병이 절반 비워질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렸을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되돌려 보지 않았을까? 어떻게 살아왔는지,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에 빠져들지 않았을까. 그녀의 상념들은, 이 그림을 휩싸고 도는 느낌만큼이나 공허하고 무력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 작품의 작가는 발라동의 모습의 빌어 자신의 심정을 그려 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공허한 마음을 술로 달래려 했던 작가 자신의 일상을 그려내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로트레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때때로 정신 착란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병원에 3개월을 입원하기도 했다. 37세의 이른 나이에 죽은 것도 술 때문이었다. 작가의 고단한 삶처럼 작품 속 여인의 삶도 그리 녹록할 것 같지 않아, 슬픈 마음이 밀려든다.

 

술을 끊으면 건강에 이롭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술을 끊으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술을 끊고 싶은 마음과 끊을 수 없는 이유가 내면에 공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갈등하는 동물이다. 매 순간 갈등하고, 짧은 순간도 갈등을 멈추는 법이 없다. “술을 끊을까? 말까?”하는 결단도 마찬가지. 술을 쉽게 끊지 못하는 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단호하게 술을 끊지 못하고, “끊을까? 말까?” 사이를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술을 끊으면 자녀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어 좋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안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친구를 만날 기회가 없어진다거나, 친구를 만나도 짜릿한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술을 끊기 힘들다고 말하기도 한다. 술을 끊으면 돈 쓰지 않아도 되고, 그 돈으로 자녀들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더 사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술을 끊으면 스트레스 풀 곳이 없다며 막막하게 여기기도 한다. 술 때문에 기억력이 감퇴될까 걱정하지만, 그나마 술을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좋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술을 마셔도 고민스럽지만, 술을 끊어도 힘든 점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루는 술을 끊어야지 하면서도 얼마 못 가 금방 ‘세상 살아 봐도 별 것 없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무슨 낙으로 사냐’며 또다시 달리게 된다.

술을 끊지 못하는 분들에게 “의지가 약하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술 못 끊는 것 아니냐. 당신이 제대로 된 가장이라면 술 끊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이가 마흔, 쉰이 넘었는데 술 하나 못 끊냐!” “나이 들었으면 제발 정신 좀 차려!”라고 함부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 겉으로는 다 알 수 없는 개인만의 고유한 고민과 이유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술을 마셔도 된다고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반드시 술을 끊어야 하는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하는 서글픈 사연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사진_픽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어도, ‘생각’을 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 누가 들어도 옳은 말을 해 주면 그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말에 따라서 행동을 바꿀 것이라고 믿겠지만, 보통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누가 봐도 옳은 말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도 이미 다 안다. 그래서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말로 반복해서 표현해 봐야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변하게 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청개구리 심보’가 어느 정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옳은 생각’이라도 다른 사람이 자꾸 강요하면 오히려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것을 ‘심리적 역반응 이론 (psychological reactance theroy)’이라고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가 침해되고 도전받는다고 느끼면, 나쁜 행동에 대한 매력이 오히려 커지고, 그 행동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게 된다. 쉽게 말해,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에게, “술 좀 끊으라!”라고 잔소리를 하면 할수록, 술을 더 마시고 싶은 마음은 더 커지고 실제로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생각’을 억지로 심어주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키지만,‘사랑’을 주는 것은 다르다. 사랑은 주면 줄수록 사람을 긍정적으로 변하게 만든다.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면서,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말과 행동을 따르고자 하는 욕구도 커진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면, 사람은 더욱더 긍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의 말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아내가 외롭다고 밤에 혼자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나요? 남편이 술을 많이 마셔서 걱정되나요? 건강 검진해서 간 수치가 올랐다고 의사가 그렇게 야단쳤는데도, 술을 끊지 못하는 가족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들을 좀 더 사랑해 주어야 한다. 그냥 꼭 껴안아 주고,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가장 사랑한다’ 하고 손을 꼭 잡아 주어야 한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일은, 사랑밖에 없다.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귀어멀 2019-05-23 09:56:53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어도, '생각'을 줄 수 없다"는 말이 깊이깊이 마음 속에 박힙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타인을 진정 이해하고 위로하는 글이네요.   삭제

    • 헤즐넛향기 2019-04-03 09:06:12

      음주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나마 위로받고 갑니다.
      블로그에 담습니다.
      불편하시거나 문제된다면 연락주세요.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ayw602/221504190132   삭제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인터넷신문윤리강령이메일무단수집거부CONTACT
      (주)정신건강연구소  |  정신의학신문  |  사업자등록번호: 105-87-08929  |  등록번호 : 서울, 아03874  |  등록일자 : 2015년 8월 25일  |  발행·편집인: 박소연
      서울 종로구 옥인동 자하문로 17길 보광빌딩 12-10  |  대표전화 : 070-7557-9104  |  팩스 : 02-320-60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선우
      Copyright © 2019 정신의학신문-의사들이 직접 쓰는 정신 & 건강 뉴스.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 Back to Bot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