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따르릉….
“지금 연결해 드릴 상담원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고객 응대 근로자에 대한 보호 조치를 취하고 있사오니 상담사에게 욕설, 폭언, 성희롱을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가족? 무슨 가족 타령이야? 진짜 가족도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데….’
“안녕하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물건을 주문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옵니까?”
“죄송합니다, 고객님. 어제, 오늘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배송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폭설? 여기는 얼마 내리지도 않았는데, 뭐 폭설? 지금 장난해?”
“죄송합니다, 고객님. 배송 조회를 해 보니 내일이나 모레쯤 상품을 받아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됐고, 당신 이름이 뭐야? 돈 받고 물건 팔면서 일 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나? 이런 XXX, 당신이랑은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책임자한테 당장 나한테 전화하라 그래.”
뚜뚜….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또는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복잡해지고 다변화된 현대사회만큼이나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들이 생겨나고 또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부합하지 못한 직업들은 소멸을 맞이하기도 하죠. 산업사회에서는 산업 현장의 안전이나 노동자의 생명, 과도한 노동 시간 등 근로자들의 신체적 안전이나 노동 착취 문제 등이 해결되어야 할 주된 문제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산업 현장이나 직업 장면에서 개선되어야 할 많은 과제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 재화를 생산해서 소비자들에게 납품하는 것이 산업의 주된 활동이었던 산업사회를 지나 서비스 산업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업은 고객에게 좋은 상품은 물론이고 생활의 편의와 질 좋은 서비스 제공이라는 과업까지 고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질 좋은 서비스와 그로 인한 소비자 만족이 곧 기업의 이윤 창출로 직결되기 때문이죠. 기업들은 자신들의 회사가 경쟁사에 비해 더 품격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마케팅에 열을 올리며, 대대적으로 큰 광고비를 지불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기업들이 ‘고객 감동’이라는 캐치프레이즈나 최고의 서비스 정신을 내세우는 정책의 이면에는 ‘고객 감동’을 실현시키기 위해 직접 발로 뛰며 온 마음을 다해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고객 응대’라는 회사의 서비스 매뉴얼에 따라 고객을 응대할 때 인사나 표정, 용모, 복장, 언어 사용과 심지어 자세나 동작까지 제한이 가해지거나 통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해외 항공사들 중에서도 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한 델타 항공사는 승무원이 되기 위한 연수 과정 또한 혹독하기로 정평이 났습니다. 연수생들은 매일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책상 앞에 앉아 강의를 듣는 것은 물론, 매일 저녁마다 있는 시험에 대비해 공부하며 주말에는 모의 비행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연수 과정에서 강사들이 연수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미소 짓는 행위’입니다. 강사들은 연수생들에게 “미소를 짓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미소가 여러분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 “얼마나 웃어야 할지 믿기 어려울 정도이지만, 그게 현실입니다.”처럼 어떠한 일이 있을 때조차 미소를 잃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승무원들은 고단한 비행 업무 중에도 끊임없이 미소 지을 것을 회사 측으로부터 요구받게 되는 것이죠.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감정노동을 많이 수행하는 직업 10가지 중 1위가 바로 항공기 객실 승무원인데요, 2위부터 10위까지 차례대로 살펴보면, 2. 홍보 도우미·판촉원, 3. 통신서비스·이동통신기 판매원, 4. 장례상담원·장례지도사, 5. 아나운서·리포터, 6. 음식서비스 관련 관리자, 7. 검표원, 8. 마술사, 9. 패스트푸드원, 10. 고객 상담원 순이었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 서비스 관련직과 영업·판매직 근로자들이 상대적으로 감정노동을 많이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 연구에서 감정노동군과 비감정노동군을 비교한 결과, 감정노동군이 비감정노동군과 달리 감정노동을 수행할수록 우울 수준이 더 높아지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연구 결과, 오스텔(Ostell)은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근로자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감정이 아닌, 조직에서 요구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감정적 부조화를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한 우울감이 자신을 ‘무력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데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죠.
예전과 달리 기업이나 사회에서도 점차 감정노동이 개인적 차원이 아닌, 노동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직업적 혹은 사회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며, 개선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상당 부분 사회적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에서는 감정노동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나 이에 대한 실질적인 방지책, 그리고 제도상의 보완이나 적절한 보상이 미비한 실정입니다.
따라서 기업과 사회는 계속해서 직원들의 감정노동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의 인권이 침해되지는 않는지, 과도한 감정 통제나 감정의 과부하로 고통스럽지 않은지 등 관련 법을 준수하고, 적절한 시스템을 도입해서 직원들의 정신건강 유지와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서비스를 받는 고객들의 인식 개선도 꾸준히 이루어져야겠습니다. 고객으로서 돈을 지불하고 그 대가로 필요한 안내나 서비스를 받을 정당한 권리는 있지만, 마치 그들이 내 아랫사람인 것마냥 호통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의 수고와 친절을 당연시하는 우리의 인식이나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자칫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분들의 마음을 다치게 한 적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이 소중하듯, 그들 역시 소중한 누군가이자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참고문헌
Ostell A(1996). Managing dysfunctional emotions in organizations. Journal of Management Study, 33(4): 525-557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읽는 것만으로 왠지 위로가 됐어요. 뭐라도 말씀드리고 싶어서 댓글로 남겨요. "
"게을렀던 과거보다는 앞으로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네요. "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