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를 학대한 부모가 욕하고 싶을 만큼 싫습니다. 저는 유년기에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고, 양친 모두에게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당했습니다. 한 번은 제 목을 졸라서 소변을 지리기도 했고요. 그래도 그때는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고 좋아했고, 어떻게든 절 의지하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수입 대부분을 부모님께 썼고, 제가 좋은 것보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저에게 왜 죽지도 않느냐고 했던 말들이 지금은 소름 끼치도록 싫은데 그때는 ‘우리 아빠는 무지해서 그래.’하며 이해했습니다. 저는 힘이 없는데 왜 이해했을까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결혼하고 나니 자식을 그렇게 욕하고 때리는 부모가 이해되지 않아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성적 트라우마가 있는 저에게 가학적 성향의 남편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생활 십여 년 만에 이혼했습니다. 그러면서부터 본가에 더 가지 않게 되고 점점 소원해졌습니다.

이혼한 제게 남들도 다 그러고 산다고 이야기하는 데 실망하기도 했고, 이제 남자를 만나면 안 된다면서 저를 순결하지 않은 여자 취급하는 말도 가시처럼 박혔어요. 그러다 동생이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며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성폭행당한 일들이 떠올랐다기보다는 갑자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날의 느낌이 났습니다. 아버지라는 인간이 술에 취해 저에게 했던 말과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싫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정말 수치스러웠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름 끼쳐 하는 저를 보더니 눈빛이 변하면서 죽이려고 하더군요. 내가 뭘 어쨌냐고 하면서요. 그날, 그때의 상황이 자꾸 떠오릅니다. 

가장 괴로운 건 그럼에도 저는 부모라고 잘했다는 것입니다. 없는 돈에도 이것저것 다 했는데 그게 갑자기 억울해졌어요. 제가 참은 건 동생들 때문이었는데 이제 이도 저도 아닌 것 같고, 내가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라는 사람의 모진 말들과 뻔뻔한 자기 합리화가 역겨워요. 

현재는 부모님을 안 만나며 살고 있습니다. 죽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제가 혼자 괴롭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 날에는 그래도 죽으면 안 되지, 살아 있기는 해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기도 합니다. 이 왔다 갔다 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요. 어떻게 하면 이 분노와 슬픔,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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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유년기 학대 경험으로 인한 상처와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연을 읽으며 사연자님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유년기에 겪게 되는 학대의 경험, 그중에서도 부모를 비롯한 가장 가깝고 친밀하다고 여기지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학대는 우리 몸과 마음에 많은 상흔을 남깁니다. 학대가 가져오는 직접적인 신체적 상처만 아니라 마음, 영혼에 남기는 상처는 훨씬 더 지속적이고 깊은 영향을 줍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주는 울타리 같은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보호자가 나를 위협하고 위험에 처하게 할 때 어린아이는 두려움과 공포,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학대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부모는 세상의 전부이자 선한 존재라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원인을 제공했다. 내가 무언가 잘못했다. 내 존재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순응적인 모습을 보이고, 나의 욕구보다 부모의 욕구를 우선시하게 됩니다. 

사연자님 역시 이처럼 학대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며 부모님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지키려고 많이 노력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 성적,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가한 것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명백한 부모님의 잘못입니다. 그 당시 신고 조치가 이루어졌다면 법적인 책임과 처벌을 물을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연자님은 부모님을 끊임없이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내면의 사투를 벌이셨던 것 같습니다. 

나를 학대한 사람들이지만 부모로서, 사랑받고 받아들여지고 싶었던 마음이 그만큼 크셨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지 못했던 것들, 결핍을 채우고자 오히려 수입 대부분을 부모님께 사용하며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부모님과 멀어졌다가 동생분의 사망을 계기로 과거의 일들이 갑자기 생생하게 느껴져 괴로움을 겪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인으로서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결혼과 이혼 과정에서 부모님과 물리적, 심리적으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유년기의 기억이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감정으로부터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을 떠나보내면서 갑자기 과거의 경험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불편감과 괴로움, 당혹스러움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이미 오래된 일이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의식 위로 떠오른 것인지 사연자님께서도 많이 놀라셨을 것입니다. 유년기의 성적 학대를 비롯한 학대 경험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성인이 되어 뒤늦게 나타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연자님의 경우, 학대의 기억 자체를 잊어버리지는 않으셨지만, 어떤 분들은 아예 그 기억 자체를 잊고 있다가 성인기에 기억을 되찾으며 괴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정신의학 진단 매뉴얼인 DSM-V에서는 트라우마를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죽음, 심각한 부상, 또는 성폭력을 직접 경험하거나, 그 사건이 타인에게 일어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것,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또는 친한 친구에게 일어난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심리적, 신체적 증상들이 심각한 고통과 사회적 기능의 손상을 야기할 때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로 진단합니다. 

사연자님이 겪으신 학대는 트라우마에 해당할 수 있는 심각하고 무거운 사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가족 관계를 비롯한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나는 학대는 오랜 기간 지속되기 때문에 복합 외상(complex trauma)의 성격을 띱니다. 

그러나 이런 트라우마를 경험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비롯한 심리적 증상의 발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의 지지를 비롯한 다양한 보호 요인으로 인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리적, 신체적 고통이 자연스럽게 완화되기도 합니다. 또, 학대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켜내고,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로서만이 아닌, ‘생존자’로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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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자님 역시 과거의 학대 경험이 떠올라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삶을 이어 온 강인함과 내적인 힘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다만 학대를 경험하며 잃어버리거나 깨어졌다고 생각되는 자아의 부분들에 대한 이해와 애도, 통합 및 감정의 표출, 과거 사건에 대한 재평가와 현재 삶을 온전히 마주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잘못한 부모님을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에 비해 부모님의 잘못을 인식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것들을 역으로 드리며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 변화의 시작이며, 발전된 모습입니다. 사연에서 남겨 주셨듯이 힘없는 자신이 오히려 왜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했을까 질문하고, 부모님께 잘해 드리려고 노력했던 사실이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 역시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내 권리와 존재에 대한 인정 욕구, 박탈되었던 것들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학대와 역기능적인 가족관계 안에서 사연자님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들을 원했는지, 받아들여지지 못한 욕구와 소망은 무엇인지, 그것이 사연자님의 자아와 과거, 현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억울하고 화나는 감정, 부모님에 대한 미움은 언뜻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대로 사연자님의 진짜 감정, 권리에 대한 표출이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려고 하기보다 자연스러운 감정이자 과정으로 여기며 충분히 다루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삶을 잠식하고 사연자님을 자칫 희생자로서의 자리에만 묶어두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과거의 경험이 사연자님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고, 그 부분에 대해 충분히 애도하며 잃어버린 자아를 통합하는 과정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연자님이 불행한 과거 사건의 희생자로서만 존재하며, 결코 현재와 미래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연자님께서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시기에 부모님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나 죽고 싶은 마음에 괴로워하면서도 ‘죽으면 안 되지, 살아 있기는 해야지.’라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노력하고 계시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런 사연자님의 내적인 자원과 힘에 칭찬과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사연자님은 ‘피해자, 희생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존자’이며 삶을 지켜 나가고, 가꿀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있는 분입니다. 씩씩하게 삶을 마주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심리상담사, 정신과 전문의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신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외상적 경험과 그 영향을 깊이 탐색하고 손상된 자아를 회복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통합해나가는 여정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차고 무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성폭력위기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 폭력 피해자 지원센터 등의 성폭력 상담 전문기관이나 심리상담센터, 정신과 등을 통해 필요한 도움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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