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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or's Mail] 어린 시절의 학대로 인생이 망한 것 같아요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01.10 10:10

사연)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는 30대 초반의 남성입니다. 저는 가족들 때문에 억울한 게 너무 많아요.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매일 술을 먹고 들어와서 욕하고, 뺨을 때리고, 물건을 부수고 했어요. 저나, 엄마나, 형제들 할 거 없이 전부 다요. 나뿐만 아니라 모두 폭력을 당했으니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어릴 때 기억이 납니다. 집에서는 아버지한테 맞는 것이 당연한 거라 여기며 살았는데, 제 몸에 멍이 든 걸 보고 아이들이 흠칫 놀라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아버지가 때릴 수 있냐고, 그거 가정 폭력이라고 친구들 앞에서 선생님이 이야기했을 때의 그 부끄러운 느낌은 아직도 저를 힘들게 해요.

그때 이후로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었어요. 물과 기름처럼, 다른 사람들과 섞이기 힘들었어요.

자포자기였던 거 같아요. 뭔가 잘못된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없었으니까요. 누구도 나를 알아주려 하지 않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그냥 수업시간에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었던 기억밖에 없어요. 머릿속에 어떤 생각도 없이, 그냥 멍-하게 있었던 기억이요.

 

대학교를 다닐 때도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사람들과 섞이기 힘들고, 같이 웃지 못하고, 혼자 움츠러들고... 결국 도망치듯 군대를 갔다가 대학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죠.

아버지는 대학도 못 간 놈, 쓸모없는 놈이라고 욕을 했어요. 저는 또 가만히 듣기만 했었죠. 뭐라도 해야 했는데,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으니까요.

어머니에게 등 떠밀리듯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지만, 누구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어요. 하는 일마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고, 그렇게 지금까지 1년을 채 넘긴 직장이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기억들이 사라진다 믿고 있는데, 사람들을 대하는 게 너무 힘들고 두려워요. 그게 꼭 아버지한테 맞았던 기억, 학창 시절에 우울했던 기억들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성격이 되어버리고, 내 삶 자체가 우울해져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직장을 나가긴 하지만 돈을 버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아무 느낌이 없고 공허하고 힘들기만 합니다.

저는 이런 삶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걸까요? 제 30년을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는 걸까요. 저에게 실마리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힘든 마음을 함께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질문자님께 먼저 위로의 말씀을 건넵니다. 

 

과거의 그림자는 과거에만 영향을 주는 건 아니지요.

지금 겪고 계시듯 가정에서의 폭력은 성인기의 대인관계 위축, 우울, 불안, 낮은 자존감을 형성합니다. 그러고 나선 그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지지요.

심한 경우 자신이 늪에 가라앉아 있는지 모르거나, 늪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날 의지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일 수도 있고요.

물론 3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힘들었던 삶이 한 번에 바뀌리라 기대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건, 이렇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글을 올려주셨다는 작은 용기입니다.

 

환자분들이 항상 저에게 묻곤 하죠.

“선생님, 저는 좋아질 수 있을까요? 이렇게 오랫동안 힘들었는데, 바뀔 수 있는 걸까요?”

 

저는 이렇게 대답해드립니다.

분명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요. 다만 많은 것들이 변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본인의 의지와 동기가 필요하다고요.

적어도 살아온 삶의 1/10 정도는 지속적인 치료에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도 말씀드립니다. 물론 정해진 것은 없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지요.

변화의 먼 여정을 떠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를 토하는 결심, 쇠심줄 같은 뚝심도 아니에요. 그저 이렇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고, 변화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작은 의지이지요.

그런 점에서 질문자님은 이미 먼 여정의 한 걸음을 떼어놓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빈말이 아니고요. 

 

변화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현재의 힘든 마음을 충분히 가라앉혀야 해요.

혼자 힘으로 힘들 수 있어요. 그러니 방향과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불안과 우울, 불면을 경감시킬 수 있는 약물치료도 도움이 되겠지요.

지금 당장 몸과 마음이 힘들다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힘겨울 수 있어요.

그렇게 차츰 생활이 건강해지셔야 해요. 자포자기로 술이나 게임 같은 것들에 기대고 계신다면, 좀 더 규칙적인 생활 리듬, 규칙적인 식사 습관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불편함이 어느 정도 덜어졌다면, 이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입니다.

막연하게 들리겠지만, 자신의 감정, 생각, 그리고 그로 인한 행동과 신체로의 영향을 인식하는 연습이에요.

대부분 사람은 상황에 마주한 자기 생각, 감정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습관대로, 무의식에 따라 삶을 살아가요.

만약 자신의 내면에 왜곡된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면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왜곡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셈이지요.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근원을 좇게 만들어요. 

 

힘든 고통의 뿌리를 찾아 내려가다 보면, 결국 두려웠던 과거와 마주치게 됩니다.

과거의 기억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고통을 자아낼 수도 있지만, 과거를 극복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에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일지도 모르지만, 현재와 연결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을 이해하고, 고통의 나날들에 대한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두려워서 차마 들추어보지 못했던 순간들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지요.

한두 번의 짧은 시도가 아닌, 반복적이고 지루한 과정이 이어지게 되겠지만, 그러면서 조금씩 나와, 세상과 그리고 미래를 보는 눈이 변하게 될 겁니다.

 

모든 사람은 성장하지만, 질문자님의 마음속에는 채 자라지 못한, 겁에 질린 아이가 남아있는 건지도 몰라요.

질문자님께서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자신을 좀 더 건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마음속에 있는 아이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주는 겁니다.

자기 위로와 연민, 마음속의 아이에 대한 공감이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그렇게 뻥 뚫려 있던 마음의 구멍이 메워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과거와 현재를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이전보다 더 건강한 삶의 방향을 택하면서 말이지요.

 

어린 시절의 학대는 현재 성인이 된 질문자님을 옭아매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다만, 과거에 자신을 학대했던 상황을 원망하고,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 당시 어리고 무기력했던, 그래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아이’를 헤아리고 위로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질문자님의 작은 용기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멀리서 질문자님을 응원하겠습니다.  

강남역 푸른 정신과 신재현 원장 드림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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