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중반 여성입니다. 

전 어렸을 때 형제자매 여러 명은 키우기 힘들다는 이유로 먼 지방의 할머니 댁으로 보내져 한동안 살았습니다. 순하다는 이유로 제가 멀리 보내졌죠. 그 후 다시 돌아올 때 전 부모를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하네요.

아마 이때부터 잘못된 거 같습니다. 아마 혼란애착이 생긴 거 같아요.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전 타인과 눈을 못 마주쳤습니다. 눈을 맞추려고 해도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왕따도 당했었죠.

이런저런 문제로 반년 전 정신과에서 퇴원한 이후에는 심각한 무기력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동아리 활동을 몇 년 동안 했는데 저희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아리가 점점 망해가니까 저희에 대한 안 좋은 평이 들려서 더 예민해졌죠.

 

몇 달 전에는 근로능력평가를 받았는데, 의무기록에 조현형 장애 의심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거랑 복지 체계에 대한 불만까지 더해져 비정상적인 분노가 이틀에서 삼일 정도 간 거 같습니다. 남자 친구랑 잠도 안 자고 6시간 내내 큰 소리로 울며 싸울 정도였어요.

 

그러다 동아리에서 익명 대화방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엄청나게 린치를 당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믿었던 후배마저 거기에 가담했을 거란 생각에 홧김에 회원들한테 짜증을 내고 탈퇴를 했습니다. 이후 통화에서 선배가 절 책망하는 말을 하자 미친 듯이 정신과 약을 또 과복용했습니다.

그 후 학업적 문제와, 경제적 문제가 모두 생겼죠. 결국 인생 포기 선언을 주변인들에게 했습니다. 더 이상 알바도 공부도 취직도 하지 않겠다고요.

체력이 너무 안 좋아 일도 제대로 못할뿐더러 전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인 걸 깨달았으니까요. 

 

제 인생은 마치 튜토리얼 대로 했는데도 오히려 더 큰 손해만 보는, 결코 존재해선 안 될 그런 사기성 게임 같았습니다.

최근에는 친구한테 망상 같은 헛소리를 했더니 주치의가 바로 조현형 성격장애로 진단했어요. 제가 너무 총체적으로 망가진 거 같고 고치기도 너무 어렵다고 해서 좌절했습니다. 

어제는 선배랑 통화하는데 상대방이 저랑 통화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또 자살사고가 올라왔습니다... 

 

대학 가면 제 인생이 다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근데 아니었고요. 가난도 문제지만 특히 인간관계가 너무 힘듭니다.

평소에 친구들과 별로 연락하지 않아서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타인은 남자 친구뿐입니다. 그마저도 남자 친구가 제 몸만 좋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어 믿을 수 없습니다. 

이외에도 모든 사람들이 절 싫어하는 것 같고 세상이 절 망신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현실도피로 인터넷에 빠졌지만 친구를 거의 만들지 못했습니다. 요즘엔 트위터를 하는데 뭘 해도 반응이 거의 없습니다. 저보다 인기 많은 사람들을 보면 너무 부럽고 열등감이 듭니다.

전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나 봐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면 다시 태어나야 할 거 같아요. 2년 넘게 약도 먹고 입원도 하고 상담도 받아봤지만 전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상담은 제가 낫질 못하니까 같은 얘기만 반복하는 게 죄송해서 끊어버렸어요. 이후 상담과 치료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제가 정신과에 가는 건 신체화 증상을 막기 위함입니다.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져 먹지도 못합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제게 관심도 없어 보입니다. 제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없어요. 그냥 죽고 싶은데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을까 해서 올립니다.
 

사진_픽사베이

 

답변) 

정신과 병동에 입원 치료를 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증상의 정도가 심했다는 의미, 다른 하나는 입원기간 동안 환자 분의 생활을 다수의 의료진이 지켜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외래 진료에서는 환자 분의 단편적인 면만 볼 수 있고, 보호자가 동행하지 않은 경우에는 환자 분의 시각에서만 상황을 전해 듣기 때문에 완전한 진단을 하기 어렵지만, 입원 상황에서는 의료진이 객관적인 상황과 환자 분의 반응을 모두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진단이 가능해지죠.

이런 이유로 현재 진단명인 조현형 성격장애에 대한 조언을 드리는 것이 적절할 듯하네요. 

 

질문자 분이 표현을 해 주신 것처럼, 튜토리얼 대로 했는데 손해만 보는 게임이라고 세상이 느껴지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잘못된 부분은 게임 자체가 아니라 '튜토리얼' 부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내 일이기 때문에 내 주관이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죠.

그래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전문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적어도 전문의는 자기 자신을 보는 자신의 눈이 부정확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질문자 분에게는, 본인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판단과는 너무 다른 것이 문제일 듯합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통화하고 싶지 않은 듯 한 느낌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요.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면, 보통은 짧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내용의 통화를 좋아하죠. 심각한 내용이라면 얼굴을 보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니까요.

그래서 통화를 한 초반에는 통화를 하기 싫다는 느낌이 없다가, 그 내용이나 통화 시간에 따라서 통화를 하고 싶지 않아 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애인과 통화를 하더라도, 애인이 싫지는 않지만, 지금 통화는 끊고 싶을 수는 있죠. 

선배 분과 통화를 하다가, 어떤 부분에서 통화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는지, 또 실제로 그 선배 분이 통화하고 싶지 않아 한 것이 맞는지, 실제로 통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면 그 의미가 질문자 분이 싫기 때문인 것인지 혹은 통화가 너무 길었던 것인지 아니면 선배의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 고민을 한 결과가 '내가 죽어야겠다.'라면, 본인의 사고 과정 어딘가에 잘못된 해석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과는 굉장히 다른 결과니까요. 

 

조현형 성격장애는 본인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판단 대부분이,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고 괴롭힐 것이다 쪽으로 치우쳐져 있고, 그래서 우울증이 동반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인 약물치료와 상담이 병행되어야 하죠. 정신과 전문의에게 상황과 자신의 판단을 얘기하고, 객관성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면, 다음에는 그런 차이를 고려해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의 몸과 정신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망가집니다. 완전히 고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아요.

내가 완전히 고쳐졌는지 여부가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현재 망가진 상태에서의 새로운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고로 다리를 잃더라도 새로운 삶과 균형을 찾고 살아가는 것처럼요.

그러니 치료를 지속하시며, 조금씩 망가지며, 그 지점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고, 함께 살아갔으면 합니다. 

 

 

♦ 정신의학신문 정신건강연구소 강남센터 개소 기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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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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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도움됩니다. 조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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