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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or's Mail] 부모의 덫에서 빠져나오질 못해요
김정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01.04 08:33

[정신의학신문 : 김정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어릴 때부터 저희 집은 콩가루 집안이었어요. 정말 흔하게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게임에 미쳐서 집에 안 오고 생활비도 안주는 아빠, 아빠 때문에 힘들게 돈 벌고 일하느라 가끔씩 자식들 탓하는 엄마. 

이후에는 새아빠가 생겼지만 결벽증같이 깔끔한 성격, 잠귀가 밝아서 그분이 잘 때는 거실에서 먹는 소리 나도 욕지거리하고...

전 공부는 중간이었지만 담배, 술 같은 비행도 안 했지만 절 나쁜 사람 취급하고...

 

새아빠와 엄마가 싸우는 이유는 항상 저였어요. 그리고 항상 저만 조용하면 집이 평화롭다고 하고, 그렇게 몇 년 사니까 길 가다가도 울화가 터지고 분노가 조절이 안 되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어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인간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을 안 가고, 회사에 취직을 해서, 차곡차곡 돈 모아서 독립했습니다.

독립하고 번호도 바꾸고 정말 속 깊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 빼고는 다 차단했어요. 그렇게 시달리던 인간들에게 벗어나니 너무 좋고 길 가다가 갑자기 우는 일도, 울화가 치미는 느낌도 사라졌어요.

옛날에는 하루하루 버티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미래에 이런 걸 하자는 계획도 세울 만큼 무기력감이 사라졌어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터, 독립 전의 유년 시절이 떠오르면 울화가 치밀고 무기력해졌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저는 그 상황을 해결한 게 아니라 도망간 것이었어요.

 

전 평생 이 울화통을 갖고 살아야 될까요. 가끔씩 이 트라우마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도 너무 갈등이 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고 치료를 받아야 될까요? 저는 20살이 되어서 집을 나오면 평범하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

너무 절망감이 듭니다. 이러다가 나도 모르게 자살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도 들어요. 도와주세요.
 

사진_픽셀

 

답변) 

잘하고 있으세요. 이미 절반을 혼자서 하신 거예요. 이제 나머지 절반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고요.

본인이 겪었던 고통을 줄이는 방법 중 하나가, '그건 별 거 아니었어.'라고 되뇌는 거예요. 많이 힘들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한 번 외면해 보는 거죠. 그러면 힘들었다는 사실에 붙어있는 정서적인 찌꺼기들을 잠깐 피할 수 있으니까요.

'흔하게 불행한 가정'이라는 표현이 그래서 더 아프게 느껴지나 봐요. 본인에게는 결코 흔한 불행이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표현할 만큼 견디기 힘들었다는 말일 테니까요.

 

불행한 가정에서 성장한 분들 중 일부는 그 가정에서 벗어나지 조차 못하세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십수 년 동안 부모가 비난을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어릴 때 부모는 신과 같은 존재잖아요. 나를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나를 끊임없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비난을 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 자체가 사라져요.

나는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부모도 원치 않는 존재라는 믿음은, 지옥 속에서 머무는 것을 스스로에게 정당화시켜 버려요.

그리고 이렇게 자신에게 이 환경이 합당하다고 믿는 순간, 그 지옥을 탈출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게 되죠. 기본적으로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해야, 날 소중하다고 여기지 않는 환경에서 도망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불행한 가정에 동반되는 아동학대는 지옥을 대물림시키죠. 자신을 나쁜 사람 취급하는 부모를, 자식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어요.

 

잘 도망치셨어요. 본인이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도망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고,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도망치셔야 해요.

본인에게 해가 되는 부모님에게서 몸이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다음 단계를 밟으면 돼요. 바로 그 부모님과 얽혀있는 마음을 분리하는 게, 남은 절반의 단계예요. 

가장 흔한 예가, 저렇게 별로인 부모의 피가 나에게도 흐른다는 생각이에요. 누구나 결점이 있잖아요. 질문자 분도 결점이 있겠죠.

그런데 그 결점을 본인이 발견한 순간, 순식간에 부모님이 떠오르고, 결국 자기 자신도 그런 부모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런 존재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올라와요. 그 시점부터는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죠.

인간관계도 당연히 영향을 받죠. 가장 가까운 가족인 부모에게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믿는 것 자체가 어려워요.

사람을 못 믿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경계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호의도 믿을 수 없게 만들어요. 결국 조금씩 고립되고, 외롭게 되죠.

 

부모님과 얽혀있는, 부모님이 채운 덫을 푸는 열쇠는 본인이 가지고 있어요. 20년 동안 그 상황을 견뎌오며 살아오셨으니, 그 속에 해답이 있어요.

하지만 방법은 본인이 모르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고생하고 계신 거고요. 열쇠로 덫을 푸는 방법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같은 전문가들이 잘 알아요.

전문가가 만능 열쇠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본인이 열쇠가 없다면 전문가도 해결할 수 없죠. 하지만 질문자 분은 확실히 열쇠를 가지고 있어 보이니, 상담을 하시면 부모님이 채운 덫을 수월하게 푸실 수 있을 거예요.

평범하게 사실 수 있어요.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오르막이 있다면, 내리막도 있는, 여정 한가운데 있는 것뿐이죠. 길을 잘 아는 전문가와 함께 그 여정을 잘 마무리하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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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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