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소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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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저 사람은 인간관계가 참 좋다.” 혹은 “그 사람이 거절하는 건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라는 평판을 듣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두루두루 사람들과 잘 지내고, 특별히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드뭅니다. 또 주변에 적을 두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마냥 휘둘리지도 않죠.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는 그런 분들께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건지 묻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을 잘 살펴보면, 다른 이들과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친밀감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적당한 선을 지킬 줄도 압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나와 타인 사이에 건강한 경계가 어디인지 잘 인식하고 있죠. 그렇다면 여기서 경계란 무엇일까요? 

경계, 흔히 심리학에서 ‘바운더리(boundary)’라고 하는 이 용어는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나와 대상의 경계이자 통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운더리가 나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너무 폐쇄적이거나 경직되지 않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류할 수 있을 만큼은 개방적이되, 자신을 공격하거나 상처를 주는 관계에서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은 튼튼해야 하죠. 그러면 건강한 바운더리의 특성과 이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바운더리가 유연하다

바운더리가 건강한 분들은 그 대상이나 자신과의 친밀도에 따라 관계의 깊이와 거리를 조절하는 유연한 바운더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으나,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어서 상대에 따라 관계의 깊이를 조절하며 자신에게 해가 되는 관계는 적절히 차단하는 유연성을 발휘합니다.

 

2. 상호 존중적이고 수평적이다

바운더리가 건강한 분들은 나와 상대를 모두 존중할 줄 알며, 상호 수평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상대를 지배하려 하거나 우위에 서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기만 하는 관계에 고착되지도 않죠.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존감을 유지하면서도 상대 역시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임을 알기에, 상대의 고유성과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수용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 우열의 문제는 아니며, 나에게 좋은 것이 반드시 상대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죠.

 

3.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

흔히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은 자기주장을 잘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깝고 친밀한 관계일수록 나의 생각이나 입장, 감정만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나 마음도 헤아리면서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도 헤아릴 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솔직하게 나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상대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건강한 바운더리를 바탕으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4. 갈등회복력이 높다

바운더리가 건강한 분들은 친밀한 관계일수록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갈등이 생기는 것은 누군가가 나쁘다거나 한 사람에게만 잘못이 있어서라기보다 서로 간의 관점이나 입장, 소통 방식 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고, 갈등을 현명하게 풀어 나갈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지요. 즉, 갈등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기보다 더욱 친밀하고 성숙한 관계를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입니다.

 

5. 건강한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다

바운더리가 건강한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세계가 있다.’는 말은, 자기 내면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느끼며, 탐색하고, 표현하는 주체로서 살아가는 내적 세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들은 자기의 가치관과 철학, 정서적 자율성 등을 바탕으로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가지고 자신이 한 선택과 행위에 책임질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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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도 타인에게 지나치게 방어적이거나 눈치를 보지 않고, 서로 연결을 추구하며 친밀감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자기 존재 자체로서의 가치와 기쁨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존재 가치와 세계관도 존중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운더리가 항상 고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비교적 바운더리가 안정적이고 건강했던 사람도 특정 경험이나 상황에 따라, 때로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깊은 상처로 인해 바운더리에 균열을 가져오거나 경직된 바운더리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죠. 

하지만 바운더리가 건강하게 작동하지 못할 때, 우리는 사적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일터와 같은 공적인 상황에서도 문제가 생기거나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상사의 부당한 직무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당하게 불만을 제기하지 못해 많은 업무를 혼자 떠맡거나, 늘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상호 협력은 잘 안 되는 사람도 건강한 바운더리를 세우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바운더리는 어떠신가요? 건강한 바운더리를 세우고, 잘 유지하고 계신가요? 만약 요즘 들어 인간관계에서 많은 고충이 느껴진다면, 나의 바운더리는 문제없이 잘 작동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소명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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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문요한(2018). 관계를 읽는 시간. 더퀘스트.

김소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KAIST 화학과 졸업
경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의학 석사
강원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불안의학회 불안장애 심층 치료 과정 수료
성인 ADHD 진단 및 치료를 위한 교육 워크샵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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