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여자입니다. 원래 제가 이런 성향이었던 건지, 첫 연애 경험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연애할 때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아야 마음이 놓여요. 남자친구를 매일 만나고 매일 사랑한다는 표현을 받아야 편안하고,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는지, 누구와 연락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카톡 내용은 어떤지 다 궁금해요.

제 가정환경은 안정적이지는 않은 편이었어요. 아빠는 어릴 적 저와 엄마에게 가정폭력을 많이 하셨고,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암 진단을 받으시고 4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아빠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며, 체벌이 심했습니다. 제가 몇 살인지, 몇 반인지, 제 생일이 언제인지도 잘 모르셨어요. 공부를 안 하거나 집에 있을 때 샤워를 안 하는 것처럼 본인 기준에 맞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었고, 친근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칭찬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시험에서 95점을 맞으면 100점도 못 맞냐면서 한심해했습니다.

엄마는 초등학교 때는 항상 항암치료를 받고, 인지 상태가 현저히 떨어져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엄마에 관한 기억은 유치원 시절밖에 없고, 그마저도 희미해져 갑니다. 사실 엄마 목소리도 잘 기억이 안 나요. 

중학교 때는 아빠가 재혼하셨는데 때리지만 않았지 흔히 말하는 계모였고, 항상 본인은 아이들이 있는 사람과 재혼해서 불쌍하게 사는 피해자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하인이나 도구 취급하면서요. 집에 있는 게 너무 싫었고 제가 방에 있을 때 거실에 엄마, 아빠가 있을까 봐 화장실도 참았다가 가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항상 친구들이나 남자친구에게 의존을 많이 했던 것 같고 마음 한 켠에 구멍이 난 것처럼, 깨진 독마냥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아요. 힘들 때 친구들에게 제 감정을 모두 쏟아내고 기대고 싶고, 남자친구 없이는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어요. 남자친구 없는 상태가 너무 힘듭니다. 

첫 연애 때는 남자친구가 저에게 너무 심하게 집착했어요. 제 모든 문자, 카톡, 일과, 통화 목록을 다 봤고 혼자 밖에 나오는 것, 짧은 치마 입는 것 등을 다 구속했습니다. 제 전화번호부의 사람들을 모두 옮기고 제 사진, 머리카락 등 저와 관련된 것은 다 모았어요. 

자존감이 낮아서 그때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나서 아닌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모습을 어느새 저도 닮은 것인지, 나중에는 저 역시 남자친구를 감시했습니다. 그러다 남자친구 카톡에 다른 친구들이 여자 몸매나 얼굴 평가, 야한 사진 등을 올리며 더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충격받았습니다. 그 후로 남자를 만날 때 혹시 성매매하는 사람은 아닐까, 친구들과 그런 내용을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닐까 걱정됩니다. 

현재 남자친구는 첫 연애 때처럼 그런 친구들도 주변에 없고 카톡에 별 내용이 없는 것도 다 알지만, 남자친구 핸드폰이 있으면 카톡 내용을 다 보고 싶어요. 그동안 뭐라고 하지 않다가 며칠 전에는 안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알겠다 하고 안 보려고 하는데 카톡 내용을 안 보면 불안해요. 저도 이런 제 마음이 이상하고 싫고, 고치고 싶습니다.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잘 안 돼서 힘들어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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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남자친구분과의 관계에서 집착하고 의심하는 것 같은 본인의 모습이 스스로도 불편하고 고치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많이 힘드실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관심의 표현이 상대방과 자신을 무겁게 하는 짐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사연자님의 고민이 잘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그 사람에 관한 것을 모두 알고 싶은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이나 사랑이 없다면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궁금하지 않을 테니까요. 연인이나 친구를 비롯한 친밀한 관계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서로를 귀찮게 하고, 간섭하며 서로의 삶에 관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의 삶에 관여하는 과정에서도 지켜야 할 경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건강한 관계를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연자님이 남자친구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마음 이면에는 남자친구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 크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어머니의 투병, 죽음을 경험하면서 가정 안에서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엄하고 무서운, 감정 표현이나 칭찬에 인색하고 잘못된 부분을 평가하고 지적하기만 하는 아버지와 생활하시면서 불안감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사연자님께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할 때 느끼셨을 공포나 무기력감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언제 어떤 이유로 아버지가 화를 낼지 예상하기 어려웠을 어린 사연자님이 늘 마음 졸이며 지내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더불어 어머니께서 항암치료를 받으시고 세상을 떠나시는 과정에서 어머니께서 언제 떠나실지 모른다는 불안감, 혼자 남겨질 수 있다는 생각이 사연자님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로서 예측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하며 삶이 무겁고 불안정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어린 시절 세상의 중심과도 같은,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할 부모님으로부터 물리적,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기 어려웠을 사연자님이 얼마나 외롭고 불안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아버님의 재혼 후에도 없는 사람처럼, 혹은 도구나 하인 같은 느낌을 받으며 생활하셨다고 하니 사연자님이 마음 두실 곳이 참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말씀하신 것처럼 친구들이나 남자친구를 통해 이런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사랑과 관심받는 느낌을 계속 받고자 하셨던 것이겠지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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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집착은 첫 연애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부분도 있겠지만,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아버지의 행동, 암으로 언제 사연자님의 곁을 떠날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상황을 지켜보며 ‘통제감’이 사연자님의 삶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되지 않았을까요. 

가장 친밀하고 안정감을 주어야 할 존재가 예측할 수 없고 혼란함을 줄 때, 그리고 그런 경험이 누적될 때 우리는 불안감과 무기력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 안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연자님이 남자친구에게 보이는 태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느끼지 못했던 친밀감이나 정서적 지지를 남자친구로부터 채우고, 부모님 이상으로 중요한 존재가 된 남자친구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나 상황으로 사연자님을 곤란하게, 불안하게 만들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고 싶은 욕구가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기에 사연자님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자친구분에 대한 충분한 신뢰를 쌓는 경험, 남자친구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을 충분히 갖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감시하는 것 같은 행동 자체에 초점을 두고 단순히 그 행동을 멈추려고 노력하기보다, 사연자님의 어린 시절 경험과 그로 인한 불안감, 감시하는 듯한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남자친구분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겉으로 보이는 행동 이면에 숨어 있는 감정과 이유를 알게 된다면, 남자친구분도 사연자님을 더 이해하며 공감, 지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연자님의 불안과 걱정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함께 더 노력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구속하고 행동을 제한하거나 옷차림, 대인관계 등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이런 행동을 지속적으로 용인하고 습관화되다 보면 데이트 폭력과 같은 더 크고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남자친구와 결별하신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반대로 사연자님이 남자친구분에게 앞으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언어적, 행동적, 정서적 폭력을 가하며 상대방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고 굴종시키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폭력, 첫 남자친구가 보인 집착적 행동의 경험이 사연자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거의 기억들이 사연자님이 현재와 미래의 삶에서 남자친구분과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영원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관계에서 안정적인 애착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현재 남자친구분과 좋은 기억을 쌓아 가고 진솔한 대화를 통해 신뢰를 주고받는 경험을 통해 건강한 관계가 가져다주는 기쁨과 충만함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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