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어느 깊은 계곡에 외나무다리가 있었습니다. 동물들이 좁고 가느다란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면 모두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발을 헛디디거나 외나무다리가 기우뚱하면서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리 아래는 거센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크게 다치거나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염소 한 마리가 외나무다리 근처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반대편을 쳐다봤습니다. 그쪽에 있는 풀이 훨씬 더 싱싱하고 맛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기로 했죠. 외나무다리 중간쯤 갔을 때 난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맞은편에서 다른 염소를 만난 겁니다. 비켜 갈 수 없을 만큼 좁았기에 한쪽이 뒤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봐, 내가 먼저 왔으니까 그쪽이 뒤로 비켜나도록 해.” 

  “아니지, 내가 더 많이 건너왔으니 그쪽이 뒤로 물러나는 게 맞지.”

  두 염소는 서로 먼저 건너 왔다느니 많이 건너 왔다느니 하면서 상대방의 양보를 요구했습니다. 누구도 먼저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싸움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험악해졌습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염소일세. 좋게 말할 때 당장 비켜나지 못해?”

  “뭐라고? 이거 아주 막무가내구먼. 어서 썩 뒤로 물러나지 못해?”

  이러다가는 맛있는 풀을 먹기는커녕 싸우다가 해가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야, 이렇게 싸우다 잘못하면 계곡물에 빠지겠다. 네가 물러나면 둘 다 좋잖아?”

  “내 말이 그 말이야. 네가 비켜나면 깨끗이 끝날 일이라고. 난 절대로 못 비켜!”

  끝내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졌습니다. 뿔을 들이밀며 상대방을 밀쳐내기 시작한 겁니다.

  그때였습니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던 두 염소는 몸의 균형을 잃고 외나무다리 아래로 고꾸라져 버렸습니다. 깊은 계곡물에 풍덩 빠진 두 염소는 허우적거리며 물살에 쓸려 떠내려가다 큰 바위에 부딪혀 죽고 말았습니다. 죽어 가면서 두 염소는 똑같은 후회를 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가 먼저 양보하고 비켜 줄 것을…….’

 

사진_ https://blog.naver.com/daramjuo/220563844384
사진_ https://blog.naver.com/daramjuo/220563844384

운전하다 보면 아찔할 때가 참 많습니다. 충분히 여유가 있다 싶어 방향지시등을 켜고 차로를 변경하려 하면 멀찍이 있던 뒤차가 갑자기 속력을 내면서 바짝 따라붙습니다. 심지어 경적을 울리거나 전조등을 깜빡거리며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말이 신호지 위협입니다. 길을 잘 알거나 내비게이션에 주의를 기울인 채 운전하면 괜찮지만, 운전 중에 잠깐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차 싶어 이정표를 확인하면 길을 놓친 경우가 있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갑자기 차로를 바꾸려 하면 순순히 양보해주는 차가 없어 애를 먹기도 합니다.

  실생활에서 양보와 배려가 가장 필요한 게 운전할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금만 더 양보하고 배려하면 교통사고도 많이 감소할뿐더러 운전하면서 생길 수 있는 다툼과 스트레스도 상당히 줄어들 겁니다. 절대로 다른 차가 끼어드는 걸 허용하지 않으면서 정작 자신은 조금만 밀리면 차로를 바꿔 요리조리 위험하게 운전한다고 해서 대단히 빨리 가는 것도 아닙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을 측정하면 충분히 양보하면서 여유 있게 운전하는 사람과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양보와 배려가 몸에 배지 않아 그렇게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평소에는 매우 온순한데, 차에 타서 핸들만 잡으면 헐크처럼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동차 경주하듯 거칠게 운전하면서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창문을 내리고 상대방 운전자에게 욕설을 퍼붓습니다. 젊은 사람이 한참이나 나이 많은 어른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내뱉고 삿대질을 합니다. 그러고도 분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보복 운전을 하기도 하고, 흉기를 들고 달려와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이 같은 도로 위의 폭력과 난폭 행위에 대해 처벌이 강화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핸들을 잡으면 평화보다는 위협을 더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핸들만 잡으면 양보를 잊은 채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는 어떨까요?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타고난 본능을 억제하며 살아갑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없습니다. 정해진 규범과 조건 등에 맞춰 살 수밖에 없죠. 대인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 선배, 상사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자동차는 이런 굴레를 벗어나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익명성이 보장된 자신만의 공간이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얼마든지 크게 들을 수 있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라도 갈 수 있으며, 내가 내고 싶은 속도만큼 달리며 쾌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는 자유의 영역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동차와 자동차라는 대등한 관계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죠. 따라서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한 대의 자동차로 인식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분출되지 못했던 억눌린 감정들, 즉 흥분, 분노, 모멸감, 무시 등 부정적인 본능들이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다른 차가 느닷없이 자기 차 앞으로 끼어들려 한다든지, 뒤차가 별안간 경적을 크게 울린다든지, 앞차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다든지 하는 일정한 계기만 주어지면 이 같은 감정들이 여과 없이 바로 폭발해 버립니다. 상대방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자동차 대 자동차로 만나는 거니까요. 게다가 차와 차 사이의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언어가 아니라 소리나 불빛 같은 비언어적 장치로 이루어집니다. 소통 능력이 현저하게 낮아지는 것이죠. 운전자들 사이에 오해와 다툼이 생기면 대화로 해결하기보다는 감정적 혹은 기계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건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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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염소’ 우화를 현대인의 삶에 적용해 보면 가장 피부에 와닿는 분야가 운전이 아닐까 싶어 운전에 관한 이야기를 해 봤습니다. 실제로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이나 시골 마을 오솔길 혹은 외진 산자락에 난 협로에서 마주 오는 차와 맞닥뜨리면 곤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느 한쪽이 두 차가 비켜 갈 만큼 넉넉한 공간이 나올 때까지 뒤로 물러나 줘야만 평화롭게 해결이 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강하게 대치하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앞으로 나갈 수 없죠. 결국 둘 다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누구든 먼저 양보하는 것이 가장 빨리 가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왜 이게 어려운 걸까요? 조금만 생각해 봐도 뻔히 알 수 있는 걸 하지 않아서 갈등이 커지고 원치 않는 파국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비단 운전만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또는 각종 단체나 모임 등에서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비교적 단순한 일도 있고 다소 복잡한 일도 있지만, 결국은 먼저 양보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다른 입장을 배려하면 원만하게 끝날 일인데도, 자존심을 내세우며 기 싸움을 하려 드니 계속해서 평행선 위를 걷게 되는 겁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며, 합리적으로 예측하는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것이죠.

  ‘양보하면 지는 거야.’

  ‘여기서 물러서면 나만 바보가 되겠지?’

  ‘조금만 더 버티고 밀어붙이면 내가 이길 수 있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인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승부를 가리는 게임 혹은 승패가 판정 나는 경기로 생각하는 것이죠. ‘양보 = 패배’, ‘고집 = 승리’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형제자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을 때 먼저 양보하기보다 상대방의 양보를 기대하거나 강요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무조건 양보하고 배려하는 건 아닙니다. 양보하면 나만 손해를 보고, 상대방에게 우습게 보일 뿐이기에 버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양보하면 두 번, 세 번 계속 양보하게 되어 패자가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뻔뻔스럽더라도 모질게 밀어붙이면 승리를 거머쥐고 이익을 얻게 되므로 눈 딱 감고 버티는 겁니다.

  손해 보고 싶지 않은 마음, 양보를 꺼리게 만드는 이 같은 심리를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대니얼 카너먼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그가 연구한 주제 중 하나가 손실 회피 편향입니다. 사람은 대부분 내가 얻게 될 이득보다는 내가 보게 될 손해에 더 주목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득으로 인한 기쁨보다는 손해로 인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이죠. 기쁨은 순간이지만, 쓰라린 기억은 상당히 오래갑니다.

  길을 가다가 5만 원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주인을 찾아주기 어렵습니다. 주머니에 돈을 넣고 집으로 왔습니다. 공돈 5만 원이 생겼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횡재에 그 돈으로 뭘 할까 궁리하니 하루 내내 즐거웠습니다.

  하루는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갔는데, 분명히 가지고 나온 돈 5만 원이 주머니에 없습니다. 어디선가 잃어버린 게 확실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돈이 없어서 물건을 사지 못하고 뒤돌아 나왔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우울한 기분이 며칠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5만 원을 주워서 얻게 된 기쁨은 오래가지 않지만, 5만 원을 잃어버려서 생겨난 허탈감과 울적함은 꽤 오래갑니다. 이득보다 손해가 내 감정과 기억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큰 것이죠.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100만 원을 벌고, 뒷면이 나오면 50만 원을 잃는 게임이 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대부분 게임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100만 원의 이익보다 50만 원의 손해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50%씩이라면 한 번은 앞면이 나오고, 한 번은 뒷면이 나왔을 때 게임 참가자는 50만 원을 벌 수 있습니다. 기대 이익이 큰 게임이죠. 그러나 만에 하나 뒷면이 나오거나 만회하려고 한 번 더 했는데도 뒷면이 나온다면 100만 원을 잃게 됩니다. 매우 적은 확률임에도 사람들은 이런 불길한 확률이 나올 것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아예 게임을 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승패를 가르는 치열한 경기가 아닙니다. 당시에는 굉장한 일 같아도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일이 많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큰 낭패를 볼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내가 먼저 물러서고,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면 지금 당장 손해인 것 같아도 결국은 그 영향이 긍정적 결과로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어도 양보할 수 없다며 버티고 싸워 봐야 나만 손해입니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합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염소 중 한 마리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내가 뒤로 물러날 테니 네가 알고 있는 맛있고 싱싱한 풀 있는 곳 한 군데 알려줄래?”

  그랬더라면 맞은편에 있던 염소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요?

  “좋아. 알려주지. 그리고 다음번에 외나무다리에서 또 만나면 그때는 내가 먼저 물러날게.”

  두 염소 모두 죽지 않고 맛있고 싱싱한 풀을 나눠 먹는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작은 것 하나를 더 얻으려다 큰 것까지 전부 잃게 되는 건 알량한 이기심과 욕심 때문입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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