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https://www.youtube.com/watch?v=aReFr2UNjzU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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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나무꾼이 강가에서 나무를 베다가 실수로 도끼를 강물에 빠뜨렸습니다. 도끼를 너무 세차게 휘두르는 바람에 손에서 미끄러진 겁니다. 도끼는 나무꾼에게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가난했기에 도끼를 새로 살 수도 없었습니다. 나무꾼은 강가에서 슬피 울었습니다. 이때 강둑에서 헤르메스 신이 나타나 나무꾼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리 서럽게 우는 것이냐?”

  “실수로 도끼를 강물에 빠뜨렸습니다. 도끼가 없으면 제 가족은 먹고살 수가 없습니다.”

  나무꾼의 딱한 사정을 들은 헤르메스 신은 도끼를 꺼내 주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잠시 후 강물에서 나온 헤르메스 신은 나무꾼에게 금도끼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네가 잃어버린 그 도끼냐?”

  “아닙니다. 그것은 금으로 만들어진 도끼입니다. 제 도끼는 쇠로 만든 겁니다.”

  헤르메스 신은 다시 강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다시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네가 잃어버린 도끼냐?”

  헤르메스 신의 손에는 은으로 만든 도끼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제 도끼는 비싼 은도끼가 아니라 그보다 싼 쇠도끼입니다.”

  헤르메스 신은 또 한 번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이번엔 틀림없겠지. 이것이 네가 잃어버린 도끼 맞느냐?”

  헤르메스 신은 나무꾼이 잃어버린 낡디낡은 쇠도끼를 들고 있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것이 제 도끼입니다. 소중한 도끼를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값비싼 금도끼와 은도끼를 마다한 나무꾼은 자신의 오래된 쇠도끼를 보고 반색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고는 도끼를 되찾아준 헤르메스 신에게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했습니다. 헤르메스 신은 나무꾼의 정직함에 감탄했습니다. 인간들이 사악한 줄만 알았는데, 저렇게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죠. 이윽고 헤르메스 신이 말했습니다.

  “너는 참으로 정직하구나. 내가 상으로 이 세 개의 도끼를 다 너에게 주마.”

  헤르메스 신은 잃어버린 쇠도끼는 물론 금도끼 은도끼까지 모두 나무꾼에게 주었습니다. 

 

  ‘금도끼 은도끼’로 잘 알려진 이 우화의 원래 제목은 ‘나무꾼과 헤르메스’입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죠.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 여행자, 도량형, 상업, 도둑과 거짓말쟁이의 교활함 등을 주관하는 신입니다. 주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전령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이 우화가 우리 전래동화인 줄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화 된 이솝 우화에서 헤르메스 신은 대개 산신령으로 등장합니다. 산에 나무하러 간 나무꾼이 연못에 도끼를 빠뜨리자 산신령이 나타납니다. 나무꾼의 정직함에 탄복한 산신령이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를 전부 나무꾼에게 주어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1906년과 1907년 대한교육회가 간행한 『초등소학』에 이 우화가 처음 소개되었다고 하니 꽤 오래된 셈이죠. 긴 세월 동안 전해지면서 한국 고유의 동화인 줄 착각하게 된 겁니다. 

 

  우화의 후속편도 있습니다. 정직한 나무꾼이 나무를 베다가 강물에 도끼를 빠뜨리는 바람에 헤르메스 신으로부터 금도끼와 은도끼를 선물로 받아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떤 욕심 많은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직한 나무꾼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캐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자신도 쇠도끼를 들고 강가로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나무하는 척하다가 일부러 강물에 도끼를 빠뜨린 후 큰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헤르메스 신이 나타나 울고 있는 이유를 묻더니 잠시 뒤 금도끼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네가 잃어버린 그 도끼냐?”

  번쩍번쩍 빛나는 순금으로 만든 도끼였습니다. 금도끼와 은도끼를 내 것이 아니라고 사양한 뒤 쇠도끼를 내 것이라고 해야 정직하다며 세 개의 도끼 모두를 상으로 받게 된다는 사실을 단단히 외워 두었는데도 금도끼를 보자 욕심이 생겨 도저히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금으로 만들어진 그 도끼가 바로 제 도끼입니다. 어서 이리 주십시오.”

  그러자 헤르메스 신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후안무치한 나무꾼에게 화가 난 것입니다.

  “이런 못된 놈 같으니라고. 네 도끼는 쇠도끼인데, 왜 금도끼를 네 것이라고 하느냐?”

  헤르메스 신은 나무꾼을 호되게 야단친 후 아무 도끼도 주지 않은 채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욕심쟁이 나무꾼은 쇠도끼마저 헤르메스 신에게 빼앗겨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우화는 정직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훈계를 할 때 빈번히 등장합니다. 정직은 유교적 가치관이 몸에 밴 한국인에게 으뜸가는 덕목 중 하나입니다.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학교에서 지정한 교훈 중 정직은 가장 상위에 있는 어휘일 겁니다. 보통 성실, 정직, 근면 등이 많이 볼 수 있는 교훈입니다. 정직한 사람을 길러 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토록 정직을 강조하는데, 왜 현실 사회에서는 정직한 사람을 찾기 힘든 걸까요? 

  우화의 교훈과 달리 정직한 사람은 매번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하고,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아부도 하며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 즉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이득을 얻고 인정을 받아 성공에 한 발 더 가까이 간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모순이죠.

  정직(正直)은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정직하다면 세상은 말 그대로 천국이 될 겁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예술도 구김살 하나 없이 반듯한 모양새가 되겠죠. 거짓, 술수, 음모, 모략 등이 발붙일 수 없는 세상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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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직한 것과 솔직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정직과 솔직은 어떤 점이 다를까요?

  솔직(率直)은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는 뜻입니다. 정직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한자를 비교해 봐도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바르고 곧은 마음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정직은 꾸미지 않는 것이고, 솔직은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영어의 뜻을 들여다보면 비교적 차이가 확연해집니다. 솔직은 ‘frank’, 정직은 ‘honest’로 번역됩니다. frank는 ‘free’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자유롭게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죠. 마음에 한 점 거짓이나 숨김도 없이 모든 걸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다 밝히는 거니까요. 

  honest의 어원은 ‘honor’입니다. 자유롭게 할 말 다 하는 게 아니라 명예를 생각하는 것이죠. 명예롭게, 명예를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게 정직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자유롭게 모든 걸 드러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명예롭게 예의를 갖춘 행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솔직함은 타인의 부족함을 들춰내는 말일 수 있지만, 정직함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말일 수 있습니다. “내가 솔직히 한번 말해 볼까?” 혹은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야.”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이제부터 너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말을 할 테니 단단히 각오하고 들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마음속의 여리고 세심한 결을 솜털처럼 부드럽고 따사로운 문장으로 어루만지는 책 『마음 사전』에서 김소연 시인은 솔직함과 정직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솔직함은 자기 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정직함은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솔직함은 전부를 다 풀어 헤친다. 이율배반적인 것들과 대책 없는 것들과 막무가내인 것들까지 그냥 다 뱉어낸다. 솔직함은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는다.

반면 정직함은 전부를 다 풀어 헤치지 않는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율배반적인 것들 중에서 일관성을 찾아 정리하고, 대책 없는 것들의 대책을 궁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함은 한층 더 정리되어 있으나 고집스럽고 편집적이다. 정직함은 가리는 것이 있다. 의도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주겠다는 신념 아래에서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정직함이다. 

 

  ‘금도끼 은도끼’ 우화에서 헤르메스 신에게 세 개의 도끼를 상으로 받은 나무꾼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헤르메스 신이 강물에서 금도끼와 은도끼를 가지고 나와 이것이 네 것이냐고 물었을 때 눈 딱 감고 내 것이라고 속여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잃어버린 쇠도끼를 장만하고도 남은 돈으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금도끼와 은도끼는 내 것이 아니라고 거절했습니다. 떳떳하게 자신의 양심과 명예를 지킨 것이죠.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해롭게 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배려의 사람입니다. 

  이에 반해 헤르메스 신에게 금도끼와 은도끼를 상으로 받기는커녕 자신이 가지고 간 쇠도끼마저 빼앗겨버린 나무꾼은 정직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르메스 신이 금도끼를 들고 나타났을 때 그는 자신의 마음을 도저히 숨길 수 없었습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황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것이죠.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표현했습니다. 금도끼가 내 도끼니까 빨리 달라고 한 겁니다. 꽤 솔직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솔직함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은 잘못된 솔직함이었습니다. 그의 왜곡된 솔직함은 헤르메스 신을 실망에 빠뜨리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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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평화를 말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미움과 증오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누구나 정의를 말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불의와 특권이 그치지 않습니다. 누구나 정직을 말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거짓과 모략이 기승을 부립니다. 점점 더 세상이 삭막하고 혼탁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몇 년 동안 마스크를 쓰고 살면서 얼굴과 얼굴을 직접 마주할 기회가 줄어들다 보니 위선이나 허위의식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요? 얼마 전 열린 제19회 평창대관령음악제 표어가 ‘마스크’였습니다. 연주자도 청중도 모두 마스크를 쓴 채 음악을 감상하고 연주했습니다. ‘페르소나’가 생각났습니다.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 벗었다 하던 가면을 가리킵니다.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 칼 구스타프 융은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자신의 본성을 감추거나 다스리기 위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이나 질서나 의무 등을 따르는 것을 페르소나라고 지칭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신경 쓰면서 자신을 좋은 이미지로 보이도록 본성과는 다른 가면을 써서 연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일지 모르지만, 시원하게 마스크를 벗어 던지게 될 어느 날, 우리 내면에 가지고 있던 가면, 즉 페르소나도 벗어 던지면 좋겠습니다. 마스크도 가면도 필요 없는 세상, 위선과 허위의식이 없는 세상, 정직한 사람들이 인정받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금도끼 은도끼 우화 속의 우직한 나무꾼이 넘쳐나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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