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규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희 아빠는 의처증을 앓고 계세요. 엄마 말로는 결혼 초기부터 그런 증상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자라면서는 아빠가 자녀들 앞에서는 증상을 숨기셔서 잘 몰랐습니다. 단지 술을 드시면 난폭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해서 방문을 잠그고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있고, 한 번은 아빠가 빨래 방망이로 엄마 허리를 때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후로 엄마를 때리지는 않으세요. 지금 생각하면 술을 드시면 의심 증상이 더 심해져서 엄마를 때리신 것 같습니다.

망상이 심해지면서 환청 증상이 나타나 소리를 지르는 등 일상생활이 어려워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약을 드신 지 15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증상이 심해지고, 이제는 자녀들 앞에서도 엄마를 의심하고 숨기려 하지 않으세요. 망상은 주로 터무니없는 내용입니다.

동네에 엄마의 외도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이웃분이 계신데 밤에 그분 차가 지나가면 엄마를 보기 위해 집 앞으로 지나간다고 하거나, 엄마가 일하면서 아빠 앞에서 그 이웃분과 몰래 손을 잡았다는 등의 이야기인데, 정작 그 순간에 그 외도 상대에게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고 나중에 엄마를 괴롭히십니다. 

부모님이 시골에 살고 계시고, 아빠가 엄마를 구속하셔서 대인관계가 좁고 그마저도 활발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이 상황 자체를 너무나 힘들어하세요.

자녀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고, 부모님의 이런 문제를 자세히 알게 되어서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각자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혼하시도록 권유하면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다고 하시고, 엄마는 아빠에 대한 측은함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이혼 후의 생활에 대한 부담감으로 부정적이십니다. 지금까지 30년을 그 고통을 참고 살았는데 이제와 이혼한다면 본인의 삶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많이 지치셨는지 아빠를 정신병원에라도 넣고 싶다고 하세요.

저는 부모님을 이혼시키거나, 따로 살게 하고 싶습니다. 거의 고립된 시골에서 두 분이 하루 종일 함께 계시니 서로를 더 괴롭게 하는 것 같아서요. 헤어져서 각자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아빠가 정신과 치료약의 부작용으로 메이그증후군이 오셨어요. 찾아보니 추체외로 증상이라고 하던데, 입과 혀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여서 발음이 새고 잘 씹지 못하세요. 혹시나 증상이 좋아질까 하는 기대로 40년 넘게 피우시던 담배도 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술을 드시고, 취한 상태로 엄마를 의심하고 괴롭히세요. 알콜중독이 이미 심한 것 같습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이런 상황에서 자녀들이 합심해서 부모님을 헤어지게 만들려고 하고, 실제로 이혼이나 별거를 하게 되면 아빠가 크게 상심하고 무너질까 봐 걱정입니다. 아빠는 술과 의처증을 빼면 정말 가정에 헌신하시고 열심히 살아오셨고, 자식들을 빼면 인생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보행에 장해가 생겼고, 메이그증후군으로 자신감도 떨어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혼을 권해도 괜찮을까요? 아빠가 걱정되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앞으로 20년은 더 사실텐데 언제까지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사셔야 하나 안타깝고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빠가 엄마를 의심할 때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루 종일 술마시고, 자고, 짜증내는 아빠를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로 돌려놓을 수 있는지도 막막하고... 아빠가 아픈 상황에서 엄마와 헤어지도록 설득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그리고 헤어져서 각자 생활하시면 아빠의 망상이 심화되지는 않을까요? 더 심각해져서 혹시라도 폭력적인 문제나 범죄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정말 너무 막막하고 힘이 드네요. 전문가 선생님의 조언이 절실합니다. 도와주세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남겨 주신 글 읽어 보았습니다. 글을 읽으며 사연자님의 염려와 불안, 걱정, 혼란 등 복잡한 감정 상태가 전해졌습니다. 정말 많은 고민이 되는 상황이실 듯합니다. 조금이나마 답변이 사연자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아버님의 약물치료에 대해 제대로 된 파악과 개입이 필요합니다. 15년간 약물치료를 받으셨지만, 현재 아버님께는 약물치료 효과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봐야 할 현상입니다. 특히 현재 아버님께 스트레스 사건이 많이 생긴 상황으로 보이는데요. 메이그증후군이 왔고, 이로 인해 언어 표현, 섭식에도 어려움이 발생했습니다. 이것만으로 굉장히 스트레스가 크실 텐데, 담배도 끊다 보니 알콜에 대한 의존도도 더욱 높아졌을 테고, 아내에 대한 의존과 집착도 더욱 심해지게 되셨습니다. 아마도 약을 잘 챙겨 복용하지 않으셨을 가능성도 있고요. 

이 모든 현상에 대해 보호자가 전문의의 소견을 듣고 약물을 바꾸거나, 부작용 완화를 위한 다른 치료적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셔야겠습니다. 그동안 복용한 약물 종류와 양에 대해서 명확히 정보를 전달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소견을 듣고 만일 필요하다면 다른 전문병원으로 옮기시는 것도 권합니다. 시골에 살고 이동이 불편하시다는 제약이 크시겠지만, 현재 보이는 증상을 조절하는 데 약물치료를 적절하게 받는 일이 무엇보다 가장 시급합니다. 가깝고 익숙해서 편한 병원에서 오래 진료를 보는 것보다는 아버님은 현재 기능에 맞춰 적확한 진단을 바탕으로 한 약물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자녀분들이 수고스럽더라도 어머니, 아버님과 함께 기존 병원에 가셔서 정확한 진단명을 듣고, 그동안의 치료 과정과 향후 계획에 대한 소견을 듣고 가족회의를 하셨으면 합니다. 

아버님의 망상을 수정하고 논리를 반박하는 것은 이미 효과가 없기에, 아버님의 증상으로 인해 당신 스스로와 가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손해를 보고 얼마나 힘든지 공감적으로 반응해주시고, 그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가족 모두 합심해서 적극적인 치료가 아버님에게 필요함을 설득하는 방향으로 가셔야겠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물론 자녀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최대한 하셔야겠지만,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셨다면, 그다음에는 두 분의 의사를 중심으로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연자님의 부모님이기도 하지만 부부 고유의 문제에 자녀가 개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부부만의 복잡한 역동이 있고, 해로운 영향을 미치면서도 관계를 끊을 수 없을 정도로 공의존성(Co-dependency)이 강력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공의존성은 알콜 중독자인 가족 구성원을 둔 가족들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었는데요. 전형적인 예를 들면, 알코올 중독 남편은 아내에게 많은 폐를 끼치지만, 아내는 남편을 간호하는 것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현재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와의 관계뿐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붙잡혀 피할 수 없는 상태'로 정의가 확대되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어머님의 경우 평생 남편 문제에 몰두하고 개입함으로써, 무의식적인 공의존이 깊이 이루어져 이혼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시는 게 아닐까 합니다. 

 

사연자님은 아버님께 이혼을 권해도 괜찮을지 물어보셨습니다. 아마 답을 이미 알고 있으신 듯합니다. 사연자님 염려대로 망상이 심화되거나 무너지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폭력적인 문제, 범죄로 이어질 걱정을 하실 정도인데요. 안타깝게도 이를 안심시켜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아버님 상태가 굉장히 불안정하고 예측이 어려운 상태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한계 상황에 내몰려서 아버님 상태가 많이 취약한 상태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상태에서는 오래 품어 왔던 ‘망상기제’가 오히려 아버님의 일상을 그나마 유지하는 기능을 하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수십 년째 가져온 망상은 매우 공고하고 타인이 깨뜨릴 수 없습니다. 아버님의 정신과적 질환의 원인은 심리적인 원인 외에도 유전적인 요인도 많이 기여합니다. 뇌의 문제이고 완치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노화함에 따라 인지능력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가는데 그럴수록 더욱 의사소통에도 오류가 빈번히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병동에서의 규칙적이고 안정된 생활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만, 아버님은 심리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십니다. 아버님이 가진 자아의 취약성은 매우 오래 지속되어 온 것이기도 한데요. 취약한 자아가 버티기 위해서는 의존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아버님은 약물, 알콜, 담배, 배우자, 자녀 그리고 망상 등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들이셔서 버텨 오신 겁니다. 집착도 심리적인 의존성의 한 형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는 것은 자아가 무너질 수 있는 극도의 공포를 줄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괴로움도 절절히 느껴지시니 지켜보는 자녀로서 매우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상식적으로 두 분 각자의 건강을 위해 심리적인 거리가 필요한 것은 맞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당장 분리가 어려워 보입니다. 인프라가 좋은 도시라면, 정신건강을 관리하는 기관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시골이다 보니 아버님을 케어할 인력이 어머님뿐이시지요. 

어머니도 워낙 지치시고 취약해진 상태셔서 아무래도 사연자께 고통감이 많이 전달되시겠지만, 어머니의 강인한 면 또한 지속적으로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니가 아버님을 수십 년 케어하실 정도면 어머니 자신과 아버님의 고통을 소화하고 책임지는 역량은 매우 크신 분입니다. 적어도 아버님보다는 크십니다. 따라서 자원이 부족하고 당장의 스트레스가 매우 큰 아버님보다 현재로서는 변화 가능성이 더 큰 것은 어머님이시죠. 건강한 기능이 더 많은 어머니가 심리적인 케어를 받으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돌볼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고통을 치유적으로 다룰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상담자는 건강하게 의존할 수 있는 지지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상담을 통해 어머님의 부정적인 정서를 환기하고, 지지적인 도움을 받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녀인 사연자님 현재 어머님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한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부모의 짐을 자녀가 견디는 것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최대한 전문가들과 짐을 나누어지셨으면 합니다. 모쪼록 부모님의 상황이 조금이나마 호전되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강남푸른 정신건강학과 의원 | 이규홍 원장 

이규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푸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과전문대학원 졸업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수료
METTAA CBT / Schema Therapy Exp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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