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후 진료 시작 후 첫 번째로 진료실에 들어온 사람은 60대 중반의 여자 환자였다. 남편과 아들로 보이는 가족들이 함께 들어와서 내 맞은편에 앉았다. 환자는 걸음걸이가 다소 부자연스러웠고 몸이 앞으로 살짝 굽어 있었다. 파킨슨병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퇴행성 뇌 질환인 파킨슨병에는 정신과적인 문제가 종종 동반된다. 뇌의 여러 영역들이 기능을 잃어 가면서 생기는 일이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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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병이 있어서 일상생활이 자유롭지 않은 데다가 남편의 외도까지 알게 되면서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고 했다. 직장에서(남편은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부하 여직원과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남편의 휴대전화를 통해 알았다. 남편은 뻔뻔하게도 그런 사실이 없다고 잡아떼었지만 증거는 차고 넘쳤다.

환자는 물건을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는 자신을 그만 괴롭혀 달라고,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40년 가까이 함께한 생활이 부정당했다고 느끼면서 환자는 하루하루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종합하자면, 환자가 병원에 온 것은 이런 문제로 인한 우울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이야기해 준 것은 환자의 이야기와는 완벽하게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중간중간 환자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들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환자가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은 결코 외도 비슷한 행동도 한 적이 없었다.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해명하기 위해 휴대전화 사용 내역을 보여주고 매일의 일정과 동선도 알려주었지만, 의심과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수시로 영상통화를 해서 아무 문제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아내는 남편이 그런 중에도 몰래 외도를 하고 있고 자신이 현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확신했다. 아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고, 근거 없이 의심을 받는 것도 억울하다고 남편은 말했다. 인터넷을 찾아 보니 망상 장애인 것 같아서 병원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어느 쪽의 이야기가 맞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아내의 망상일 수도 있다. 남편이 외도를 하면서 아내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몰아가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내(환자)가 이야기하는 외도의 근거라는 것들이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남편은 휴대전화 벨소리가 세 번 울리면 전화를 받는데, 그것이 외도의 틀림없는 증거-내연녀와의 신호-라고 아내는 말했다. 남편의 외도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런 신호가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영상통화를 할 때 남편이 잠깐 고개를 흔들었는데, 이것은 옆에 있던 내연녀에게 화면에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메시지였다.

증거라기보다는 외도에 대해 교정이 어려울 정도의 확신이 있고, 상황들이 여기에 끼워 맞추어지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리고 이 두 부부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이 남아 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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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 환자를 진료할 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은 파킨슨병 약물로 인한 부작용이다. 파킨슨병 약은 우리 뇌에서 운동을 담당하는 부분에 영향을 주어 질병으로 인한 움직임의 이상을 완화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뇌의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충동 조절에 영향을 주어서 도박 문제,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생각의 흐름과 내용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약물의 복용은 삶의 기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필수적이기 때문에 약을 끊을 수는 없다. 이런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만이 방법이다.

시간적 선후 관계를 따져서 함께 고려할 때 이 환자와 남편이 호소하는 상황은 파킨슨병 약물로 인한 문제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였다. 망상장애가 지금 환자의 연령대에서 초발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파킨슨병 부작용을 완화시킬 수 있는 약을 처방했고, 환자에게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2주 뒤에 내원한 환자는 남편이 마음을 고쳐먹고 이제는 신뢰를 회복해 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파킨슨병 약물의 사용과 관련해 의학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진료였지만,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은 것은 환자의 모습이었다. 남편의 외도를 확신하고 이야기하는 아내의 모습은 슬픔을 넘어 비통함, 그리고 절망에 가까웠다. 가장 가깝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김재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으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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