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20대 후반 남자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가정환경이 불우했습니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 불화로 이혼하고 경제적으로 좋은 환경도 아니었으며 저를 돌봐주시던 할머니와 아버지도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닐 때도 내성적인 성격과 얼굴도 못 생겨 친구도 없었고 단체생활에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었고 무언가에 집중을 잘 못 했습니다.

고등학교 수능도 망쳐서 대학교도 좋은 곳을 가지 못해 지방 전문대에 맞춰 입학했습니다. 대학생활도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성적도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졸업하고 갈 곳이 없어 중견기업 생산직에 몇 년 다니다 교대근무가 힘들어 그만두고 지금은 몇 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살아온 게 후회됩니다. '순간이동 버튼이 있다면 불구덩이 한가운데로 들어가 순식간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도 내 인생은 돈만 모으다 늙어 죽는 게 전부인 거라는 걸 알게 되니 인생이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져요... 불행한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결국 어딘가에 정년까지 직장을 다니고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데 제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만 되고, 그때까지 산다 해도 내 인생이 뭐가 달라질까, 그냥 지금 편하게 죽어버리면 다 끝날 것 같다는 생각만 듭니다. 사는 게 점점 재미가 없고 영원히 편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만 어느 순간부터 계속 듭니다.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재옥입니다.

고민 글을 읽는 것으로도 저도 함께 막막해지네요. 저는 글을 읽는 잠시 동안만 이런 감정을 느끼지만, 질문자 분은 계속 이런 감정 속에서 생활하셨을 테니 고통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정리를 하면, 부모님의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 돌봐주시던 할머니와 아버지와의 이른 사별, 뛰어나지 않은 외모와 사교성, 성적, 마지막으로 현재 직업이 없으시죠. 

이렇게 질문자 분이 적어주신 인생을 이렇게 정리를 해서 보니 조금 더 막막하네요.  

 

그런데 진료실에서 많은 분들을 뵙다 보면, 제가 저 인생이라면 정말 힘들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행복하다고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업 실패로 갚아야 할 빚이 수십억이고, 평생 갚기 어려울 것이란 걸 알지만, 꾸준히 일을 하시고 건강을 챙기시는 분도 있으셨어요. 일을 많이 하셔서 수면 패턴이 꼬였고, 불면증 때문에 방문하셨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제 안쓰러움을 느끼셨는지, 웃으면서 그러시더라고요. 

“이전의 삶과는 또 다른 이것도 나름의 삶입니다, 전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대부분은 큰 부자가 되지는 못 할 겁니다. 그리고 부모나 가정환경을 우리가 선택할 수도 없죠. 사고나 재난 또는 사업의 부도를 우리가 선택해서 피할 수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수능 전날 잠을 푹 자는 것도 선택하지 못하죠. 

우리의 삶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을 내가 결정하려 한다면 삶이 고통스러워지겠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또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도 삶이 무기력해질 겁니다. 

그래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과 결정할 수 없는 것을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나는 좋은 직장에 다니고 싶은데, 이건 결정을 못하는 게 아니냐. 그런데 내가 스펙을 쌓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데, 고스펙이 되면 결국 좋은 직장이 되니, 좋은 직장에 가는 것은 내가 결정을 할 수 있는 거냐 결정을 할 수 없는 거냐?”라고 물어보곤 하시죠. 

내가 노력을 해도, 다른 지원자의 수준이나 그날의 운, 면접관의 성향에 따라서 취업이 안 될 수도 있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모여서 결정할 수 없는 것들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아주 간혹 결정할 수 없는 것을 뒤집기도 하지요. 

 

질문자 분의 경우로 보자면, 당장은 일을 할 만큼의 에너지는 없어 보이시네요. 하지만 지금 밖으로 나가서 산책을 할지 안 할지 정도는 본인이 결정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밖에서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타인의 삶에 힘을 얻고 다시 삶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일을 구하고 싶은 생각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시점에서는 본인이 당장 들어갈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갈지 아닐지는 결정하실 수 있겠죠.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은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이렇게 들어간 직장에서 또 우연한 기회에 조금 더 경제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이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이제 그 시도를 할지 안 할지는 본인의 결정으로 돌아올 겁니다. 

 

결국 인생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우연히 오는 기회가 씨실과 날실처럼 짜여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질문자 분이 순간이동 버튼이 있다면 불구덩이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 것이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20대 후반까지 수많은 결정의 순간과 우연한 기회, 스쳐 지나간 행복들이 있었을 텐데, 순간이동 버튼으로 굳이 불구덩이에 가려고 하시다니요. 

그만큼 현재 상황이 어렵고, 혼자서는 그 상황을 극복하시기 어렵다는 얘기인 걸 압니다. 그러니 집 밖으로 나오셔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근처 정신과 의원이라도 가셔서 상담이라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병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안전이 보장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순간이동 버튼을 얻으신다면 가고 싶은 곳이 좀 더 행복한 곳이기를 바랍니다.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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