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현재 직장을 다니고 있는 30대 여성입니다.

돌이켜보면 제 인생은 그래도 하고 싶었던 것들은 이루면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여행도 많이 다녔고, 사고 싶은 것들은 사고, 친구들도 잘 만나고 주변에서는 항상 저에게 밝아서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우울감은 항상 잘 지내던 저를 끝없이 집어삼킬 때가 많았습니다. 항상 무언가 결핍되어 있었고 공허하며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나를 자책했던 것 같아요.

살면서 수차례 연애에 실패하고 이제 결혼도 못할 것 같습니다. 삶에 재미가 없고 의욕도 없고 친구들 만나는 것도 싫고 그냥 내일 아침 일어나면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에서 증발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죽으면 사는 것보다 편할까요. 괜찮다가도 항상 주기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바닷가에 가서 몸을 던지고 싶어요. 사랑하는 엄마 때문에 꾹 참고 살아가지만 너무 힘들고 공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자란 결핍 때문일까요. 정신과 상담은 받아본 적이 없는데 받는다면 괜찮아질까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입니다.

반복적인 우울감으로 힘들어하고 계시군요. 공허감과 무기력감, 우울감 때문에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드신다니 얼마나 힘들어하고 계신지 짐작이 됩니다.

오히려 주변에서는 질문자님을 밝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어쩌면 그 점 때문에 우울과 공허가 더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싶은 걱정도 듭니다. 남들 앞에서는 아무 문제없는 사람인 것처럼, 밝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으니 말이지요.

 

정신의학에서 분류하는 주요우울장애의 큰 특징은 '삽화적(Episodic)'이라는 것입니다. 삽화적이라는 함은, 증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기간과, 증상 없이 괜찮게 지내는 기간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아무렇지 않은 일상적인 나날들 사이에 '우울 삽화'들이 이따금씩, 때로는 자주, 삽입된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울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 이상 없이 괜찮은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래 특징이 삽화적이기 때문에 저절로 증상이 사라지며 삽화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저절로 지나갈 것, 잠시만 그러는 것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질환 자체의 그러한 특성 때문에, 환자 스스로도 치료받아야 하는 병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곤 합니다. 예전에도 이러다가 괜찮아졌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울감과 무기력감, 무가치감, 자살사고 등이 2주 이상 매일 지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주요우울장애의 우울삽화로 진단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단순히 진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반드시 치료받아야 하는 "질환"입니다. 우울 삽화 중에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곤 하긴 때문입니다. 질문자님께서 표현하신 그대로 정말 끝없는 공허감과 우울감, 자살사고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울삽화는 재발하기 쉽습니다. 치료받지 못한 우울삽화가 재발을 반복하게 되면 점점 더 삽화가 길어지고, 빨리 재발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점점 우울삽화를 겪는 기간이 그렇지 않은 기간보다 길어지게 되기도 합니다. 우울에서 헤어 나오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질문자님께서도 반복되는 우울의 기간 때문에 점점 지쳐가고 계시다면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습니다. 이미 그동안 반복되어 왔었고, 현재에도 그동안의 고통들을 다시 경험하고 있다면 앞으로도 그 고통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할 위험성이 큽니다. 더구나 질문 글을 통해, 일상 중에도 늘 공허감과 무가치감이 있으셨다고 하셨듯, 자주 반복되는 우울은, 우울 삽화가 아닌 기간마저도 점점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치료 방법이 약물치료가 되었건 상담치료가 되었건, 일단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의 위험성을 객관화하기 위해라도 병원 방문을 통한 검사를 권유드립니다.

 

덧붙여, 현재의 상황이 정말 병원을 방문해야 할 만한 상황일까 하는 의구심이 해결되지 않으신다면 "기분차트"를 그려보시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종이를 가로로 놓고 길게 가로축을 그은 뒤 그것을 기분차트의 시간축으로 삼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로축을 따라 나이를 먹을 때마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그 해의 기분은 어떠했는지를 표시해볼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해마다가 아니라 분기별로 표시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가장 평균적이고 문제없을 때의 기준을 가로축 위의 점, 0점으로 두고, 우울감을 -1점부터 -10점까지로 매겨서 아래를 향한 그래프로 그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쁠 때의 기분을 +1점부터 +10까지의 점수로 매겨 위로 그리는 것이지요.

차분히 차트를 그려보고 나면, 작성자님의 일생을 좀먹어왔다고 느끼시는 우울감이 실제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좀 더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길어지고 점점 더 깊어지는 우울삽화를 스스로 관찰하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우울삽화가 반복될수록 전반적인 차트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우울'의 강력한 힘을 다시금 관찰하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기분이 '나의 일상' '나의 삶'을 실제로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울감 때문에 내가 점점 변해가고 있다면, 우울감이 나를 점점 잠식하고 있다면, 분명히 치료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우울증의 치료는 약물적 치료와 상담적 치료 양쪽 모두, 그리고 둘을 병합한 치료까지 치료효과가 명확히 입증되어 있습니다.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치료를 받는다면 최소한 우울감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멀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자님도 정신건강의학과의 문턱을 마냥 어려워하시기보다 방문해보고 결정하실 수 있길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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