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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or's Mail] 제 존재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 승인 2020.02.10 00:02

[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40대 여자입니다. 저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20대 중반에 부모님이 반대한 남자와 결혼했고, 술만 먹으면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의처증이 있는 남편과 살면서 맞을 때마다 손목을 긋기 시작하면서 큰 수술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다 죽도록 맞은 어느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칼로 절 찌르는 남편을 본 후 바로 부모님께 전화해서 1년간의 결혼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때부터 술을 만취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매일 만취해서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불면증과 우울증 치료를 했고요. 술을 먹으면 약을 먹지 말아야 할 텐데 저는 술과 약물을 같이 먹었고, 저도 모르게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했고, 전 기억이 안 나는데 길거리를 걷다가 쓰러지고, 119에 실려 가고 한 번은 건물 4층에서 떨어져서 장애 5급 받을 정도로 많이 다쳐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1년 반 동안이요. 그 시간 동안 부모님은 저를 위해 하루도 안 빠지시고 제 옆에서 저를 간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부모님의 사랑에 죄책감을 느끼고, 술과 약 모두 끊었습니다.

문제는 저는 지금 다리도 절고, 허리도 일상생활에 무리가 있어서 독한 진통제와 타진이라는 마약성 진통제를 먹고 있습니다. 타진을 끊으려고 하는데 약물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약을 안 먹으면 온몸에 오한이 돌고 식은땀이 나며,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습니다. 그러면 침대에서 며칠씩 나오지 못하다가 다시 먹습니다. 결국 죽어야 이게 끝날 것 같다는 생각만 하다가 계속 죽으려고 합니다. 일을 하지 못하는데 예전에 대출받은 곳에서 차압은 들어온다고 하고. 저는 이제 기초생활 수급자이며 장애인입니다. 지금도 임대아파트 거주 중이고요. 압박감과 약물 중독으로 하루 종일 죽을 생각만 합니다. 저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진_픽사베이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 정희주입니다.

추측컨대 현재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커다란 압박을 받고 계신 것 같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죽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울감과 절망감은 누구나 느낄 수 있고 글쓴이분이 처한 현실 또한 녹록지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의 감정 상태는 우울증으로 진단 내릴 수 있을 정도이고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신의학에는 ‘귀인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생활사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치우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현재 상황을 더 어렵게 받아들이고, 이것이 우울감을 유발하여 사간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문제의 발생을 외적인 원인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에서 찾으려는 사람은 쉽게 우울해집니다.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마무리한 이후 수차례의 자살 시도는 아마도 이혼을 남편의 의처증이 아닌 그런 남편을 선택한 나의 어리석음이나 의처증을 유발한 나의 잘못으로 탓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건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삶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 역시 우울증을 유발합니다. 약을 안 먹어 오한과 식은땀을 비롯한 각종 증상이 나타난다면 이를 약물 금단증상으로 보고 금단 및 중독에 대한 정신과적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물 금단이라는 국소적인 의미가 아닌 나의 의지 부족, 불행한 인생 등으로 의미를 확장한다면 문제해결은 더욱 어려워지고 우울감은 심해집니다. 차압을 받는 것 역시 재정적 어려움이라는 제한된 의미를 넘어 인생 전반의 문제라고 생각해버리면 해당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떻게 차압을 해결할지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처럼 과도한 의미부여는 문제를 흐릿하고 무겁게 만들 뿐입니다.

 

현재의 문제를 가변적인 것이 아닌 고정적인 것으로 보는 귀인양식은 희망을 잃게 만들어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약물에 대한 의존을 극복하고 미래에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은 병원에 가 치료를 받게 하는 동력이 되지만, 미래에도 여전히 약물에 의존할 것이라는 생각은 체념으로 이어지고 금단증상을 치료할 시도조차 못 하게 만듭니다. 경제적인 상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하든지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은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출금이나 차압을 해결할 실제적인 방안을 강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글쓴이분은 상황을 변화시키고 극복한 경험이 있습니다. 지옥 같은 결혼 생활에서 결국에는 벗어났고 반복적인 자살 시도와 우울감 역시 호전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러한 문제들이 결국 나아진 것처럼 지금의 문제 역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신체적인 고통이나 경제적인 곤란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배운 것이 있는 것 같아 글쓴이분의 현재 내적 상황과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위와 같이 짧게나마 생각해보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결국 나의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뀌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겠지만, 조금씩이라도 사건의 다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 죽고 싶은 생각과 무력감이 지속된다면 주저 말고 주치의 선생님에게 모두 털어놓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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