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죽고 나면, 제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조금이나마 알아주지 않을까요?”

진료실에 앉아 있으며 수없이 들어왔던 이야기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자살이라도 해버리면 그 사람이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자기 잘못을 조금이라도 뉘우치지 않을까요?’ 하는 토로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아픈 마음속에서도 떠오른 적 있는 토로일지 모르겠다.

 

얼마 전 한 여자 아이돌의 비보가 전해졌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또 다른 여자 연예인의 소식으로 떠들썩한지 불과 3주 만이다. 둘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절친한 만큼 공통점도 많았던 것 같다. 둘 다 수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리던 주인공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미워했고, 어떤 이들은 그들을 사랑했다. 비난과 혐오, 동정과 위로, 오해와 편견, 애정과 집착이 범벅된 수많은 시선들은 마치 토사물처럼 그들을 오래도록 뒤덮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뒤집어쓴 채 환하게 웃어야만 했다. 그리고 차례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들이 정확히 어떤 연유로 자살이라는 끔찍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는지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들도 한순간 ‘내가 죽어버리면 얼마나 힘든지 좀 알겠지.’라는 생각을 떠올리진 않았을까. 그들도 죽음으로 위로를 받고 싶은 충동을 느끼진 않았을까. 두 어린 영혼이 떠나고 난 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착잡하던 기분이 더욱 복잡해진다. 사람이 아닌 상품을 품평하듯 차가운 말들을 쏟아내던 그 많은 목소리들이 한순간에 추모의 물결로 변해버렸다. 악플을 달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악플러들을 욕하는 사람들만 남았다. 더 나아가 추모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비난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정말로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고통을 헤아려주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극단 이후에야 가해를 깨닫고 피해를 되돌아보고 있다. “얼마나 힘들면 자살했을까...” “결국 그 몹쓸 것들이 사람을 자살까지 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목소리들이 웅성거린다. 고인들이 생전에 그렇게 듣고 싶어 했을지 모를 그 말들이 웅성거린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이미 사라졌지만 위로가 차고 넘친다. “죽어버리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하겠죠.”라는 자조. 면담 테이블 너머에서 전해오는 그 절박한 외로움을 만날 때마다, 나는 매번 안타까움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다. 쓸쓸한 고백에 매번 가슴이 저려온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처럼 느껴질 법도 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대상을 잃고 나서야 돌이켜 봐야 했던 책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나서야 반성이 쉽기 때문이다. 연예인 자살 이후의 현 세태는 그 비정한 현실을 잔인하게 반영하고 있다.

 

자살의 심리적 동기는 각기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많은 이들이 죽음을 앞둔 채 다른 이들의 위로를 기대한다. 자기 스스로를 파괴해서라도 그 고통을 이해받고자 기대한다. 죽음으로 이해받고 싶은 마음, 그래서 자살하고자 하는 마음은 [표출되지 못한 적개심이 방향을 틀어 스스로를 향하게 된 경우]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적개심은 두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적개심은 나에게 상처 주고, 나에게 무관심했던 타인을 향한 적개심이다. 자살이란, 그 적개심의 방향을 틀어 스스로를 찌름으로써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이라는 간접적인 공격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개심을 이렇게 해소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은 스스로 쉽게 알 수 있다. 너무나 원초적이고 충동적이어서 때로는 더욱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마음이 왜곡된 환상이라는 것을 찾아가기가 어렵지 않다.
 

사진_픽셀


사실 그보다 더 잔인하고 은밀한 적개심은 두 번째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어떤 마음에 대한 적개심이다. 항상 ‘어른스럽고 씩씩해야 한다.’라며 다그치는 마음에 대한 적개심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나 살다 보면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있다. 어린아이처럼 울고 떼쓰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우리 안에는 그러지 못하도록 우리를 옭아매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은 우리를 항상 의젓한 어른처럼 행동하라고 다그치고, 간혹 지나치게 가혹해지기도 한다. 힘들어서 내려놓고 싶고,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을 때마다 ‘일어서!’라며 채찍질을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견딜 수 없이 지쳐갈 수밖에 없다. 지치고 화가 나서 자기 안의 그 마음에 대한 적개심을 쌓아가게 된다.

스스로가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이 두 번째 적개심은 때때로 폭발하며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해버리곤 한다. 위로받고 싶다는 욕구를 금지하는 그 존재를 파괴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위로받고자 한다. 죽어버리고 난 뒤에야 위로받고 이해받을 수 있게 된다. ‘자살하면 그동안 숨겨온 괴로움을 좀 이해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쓸쓸히 읊조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은 외로움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나의 괴로움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넘실댄다. 그 분노 밑에는 이해받고 싶은 마음, 위로받고 싶은 외로움이 한처럼 서려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는 울부짖고 안기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있다.

실제로 죽음을 향해 가는 길 목전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외로워하고 있었다. 사무치게 외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손을 내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손목을 그을지언정, 그 손을 내밀어 붙잡아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죽음 앞에서 서성이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그 외로움과 스스로를 꽁꽁 싸매고 있는 괴로움. 그것들을 이해해주는 것. 그 모순적인 불안함을 이해하고 다가서 줄 수 있는 마음, 먼저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마음 말이다.

 

죽고 나면 정말로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더 이해해줄지 모른다. 조금이나마 더 동정해주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조금이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껴줄지 모른다.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러하고, 세상이란 게 그렇게 잔인하지 않던가. 슬프게도 별이 되어버린 두 찬란하던 스타들에 대한 말들이 그 서글픈 현실을 더욱 일깨워준다. 그러나 혹여 그러한 기대로 자살 앞에 유혹받는 이들이 있다면, 나의 직업적 소명을 변명 삼아 진부한 말을 더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당신은 그만큼 외로운 것이라고, 그만큼 위로받고 싶은 것이라고, 그러니 주저 말고 손을 내밀어도 좋다고 말이다. 분명히 그 손을 맞잡고 당신의 외로움에 닿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설리 양과 구하라 양의 명복을 빕니다.

자살예방 상담 전화 1393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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