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픽사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필요로 할 만큼 현대인들은 확실히 바쁘고 피로하다. 맹렬히 채찍질하는 현실에 쫒기며,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목말라 한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될 순간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한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무념무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불가에서는 수행을 통해 일체의 애착과 분별에 대한 사념을 끊고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도통(道通)하여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설 같은 경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적어도 인간의 의식과 사고가 뇌에서 비롯한다고 간주하는 현대의학의 관점에서는 무념의 상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과학계가 깨닫고 주목하기 시작한지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2001년 미국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의 Marcus Raichile 교수팀이 발견한 DMN(Default Mode Network)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의학자들이나 과학자들 역시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는 뇌의 활성도 감소하여 휴식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fMRI를 통해 들여다 본 우리의 뇌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활성화되고, 어떠한 작업에 집중할 때에 오히려 활성이 감소하는 회로 시스템이 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휴식상태의 활성 네트워크를 레이클 교수팀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라 명명했다.

 

사실, 멍하니 있을 때에도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굳이 MRI 영상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두커니 서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이런저런 잡념들이 머릿속을 방향성 없이 이리저리 오가는 경험은 우리들 누구나 하고 있다. 오히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시간보다 무목적의 잡생각들로 머릿속을 채우는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그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멍한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의외로 무척 중요하다는 것이 DMN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의 역할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뇌와 의식이 이 네트워크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폴트 모드에 활성화되는 부위는 주로 기억과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부위들이다. 휴식상태의 뇌가 주로 하는 생각들은 대부분 나에 관한 내용들이다. 다른 작업에 몰두하고 집중해 있을 때는 '나의 느낌’, '나의 경험’ 등과 같은 '나’에 관련된 의식을 잊고 외부의 사건에 집중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는 의식의 초점이 의식 스스로에게로 돌려진다는 것이다. 뇌는 휴식하는 동안, 과거의 경험들을 반추하고 여러 가지 상황들을 상상해보면서 자아를 형성하는 의식의 조각들을 다시 조립하고 끼워 맞추는 시간을 갖게 된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에는 단순한 기분(mood)의 고저로 증상을 나타내는 것 이외에, 이러한 디폴트 모드 활성의 이상으로 우울증의 증상을 설명하기도 한다. 우울증 환자들이 부정적으로 왜곡된 자기상을 갖고, 미래에 대한 비관적 관점을 갖게 되는 이유가, 휴식 상태의 뇌 활성에서 이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휴식상태-디폴트 모드에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잡념과 공상의 상태가 기본적으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을 통합하여 자아를 다지는 과정 자체가 부정적 반추(negative rumination)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고, 결국 제대로 뇌가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며 정신적 피로도가 점점 상승하게 되고, 중립적인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지와 기분의 저하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가속화된다. 우울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조차 우울하게 되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을 받아 연산하고 처리하여 반응으로 출력하는 신경회로 시스템으로서의 인간의 뇌가 컴퓨터와 다른 점은, 바로 ‘의식’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자아는 정보를 처리하는 주체가 스스로를 인식하고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연산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는 소프트웨어적 개념이다. 영혼이라는 초자연적 개념을 배제하고 설명했을 때의 말이겠지만 말이다. 즉,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반추의 시선에서 스스로가 탄생할 수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본질적으로 나를 형성하는 무른모의 요소는 내가 나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달려있을 수밖에 없다. 디폴트 모드-휴식을 취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멍 때리고 있을 때’ 쉴 새 없이 복닥거리는 공상과 잡념의 잡동사니들에서 자아의 형상이 떠오른 다는 것이다.

베트남 출신의 명상가이자 시인인 틱낫한 스님은 명상 에세이집 ‘소음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의 침묵’에서 ‘생각을 멈추기 위한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틱낫한 스님은 일어나는 생각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라지게 하면서 내면의 빈자리를 만들면 참된 열망을 깨닫고 기운도 얻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가정의 무게와 사회의 무게에 깔리듯 짓눌려 하루하루의 고된 일상을 헤쳐 나가기 바쁜 현대인들은 늘 불안하다. 잠시라도 멈춰서면 거슬러 오르는 이 삭막한 사회의 물결에 휩쓸려 내려갈 듯, 잠시라도 정신을 팔면 어깨 위 삶의 무게에 깔려버릴 듯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 매일을 싸워가느라 불안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을 수 있는 여유를 타는 듯이 갈망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순간에 불안해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정신없는 일상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그저 멍하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참된 휴식을 잃어가면서, 각자의 자아와 정체성 또한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잡념의 반추에서조차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스스로의 형상은 점차 흩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가장 바쁜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뇌에게, 우리의 영혼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전진의 채찍질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올바른 휴식일지 모른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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