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새로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김부장님>”

지옥 같은 회사에서의 하루를 간신히 버텨내고, 남들보다 2시간 늦은 퇴근길을 힘겹게 헤치고 와, 이미 어둑해진 하늘을 뒤로 하고 집에 들어온 뒤, 피로해진 몸을 이제 갓 씻고 나와 쇼파에 스트레스로 흠뻑 젖은 무거운 몸을 던지자마자 들려오는 핸드폰 알람음. 작은 핸드폰 화면에 떠오르는 알림창 하나.

악마 같은 ‘김부장’이라는 이름이 알림창에 뜨자마자 벌써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짜증과 답답함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머릿속에선 온갖 욕설과 저주의 단어들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벌써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잠자리에 들기 전, 찰나처럼 짧지만 하루를 닫는 소중한 휴식이 순식간에 바짝 말라버린다. 머릿속을 왁자하게 가득 메운 욕지거리들 중 몇 놈들만 중얼거리듯 툭툭 입 밖으로 새어나가는데, 그마저도 멈출 수가 없어 입에서 욕이 끊이질 않는다.

 

지난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신경민 의원은 소위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법’을 발의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법안의 실효성이나 합리성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퇴근 후에도 계속 되는 상사의 연락이 대부분의 직장인들을 괴롭히는 주범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업무 외 시간에도 일에 관한 이야기나 꾸중 등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사실 분명히 화가 날만한 일이고, 부당한 일이다. 스트레스를 받을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을 떠나서, 위에 묘사한 누구나 한번쯤 겪어 보았을만한 흔한 상황 속에는,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정신건강을 피폐하게 만드는 불유쾌한 본능이 숨어있다. 아직 김부장의 메시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김부장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꿀 같은 휴식시간을 산산이 조각내고 분노와 스트레스로 머릿속을 가열시키고 있는 그 반응 말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사실 정신의학에서 환자들의 증상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단번에 잘 짚어주는 문장이다. 과거의 외상적인 기억이 현재의 중립적이거나 무해한 상황에서도 과거와 같이 괴로운 반응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행동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공포조건화나,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전이(transference) 등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뇌신경과학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스트레스 반응에 대해 그 얼기를 설명하고 있다.

 

해마 유연성(Hippocampal malleability)의 저해란, 스트레스에 의한 해마의 분화 지연을 설명한다. 자극에 대한 연합, 처리, 반응을 거듭하며 우리의 뇌세포들은 재생과 발달, 분화를 이어가는데,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해마(Hippocampus)의 신경세포 생성이 저해된다는 것이다. 해마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 구조물 가운데 하나인데, 해마의 신경생성이 저해되면 단순히 기억력이 저하되는 것뿐만 아니라 해마가 기억을 처리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는 해마가 상황에 따른 감정(contextual emotion)을 기억과 연관하여 처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분류하여 기억하고, 향후 기억을 회상하게 되는 상황에서 맞춰 어떤 기억을 연결시켜 주게 되는가를 해마가 주로 처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 내용이 확인되지 않은 -칭찬일지 질문일지 질책일지 어떤 내용일지 확인되지 않은 메시지의 발신자 정보만 확인한 상태에서, 발신자 ‘김부장’이라는 정보를 처리하는 데에는 해마가 그와 연관된 기억을 통합시켜주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거 김부장으로부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많았을 경우엔, 그와 관련된 기억이 형성되는 해마의 유연성이 감소되어, 기억의 분화(deferentiation)가 올바르게 형성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그럴 경우 ‘김부장으로부터의 메시지’라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중립적인 자극은 과거의 부정적인 감정 상황의 기억들을 회상시키며 스트레스 반응을 촉발하게 된다. 해마에 의해 촉발된 스트레스 반응은 곧이어 각종 스트레스 호르몬들과 자율신경계 반응으로 이어지며 중립적 자극을 스트레스 자극, 공포 자극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미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우리의 뇌는 외부의 정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극이 뇌에서 처리되는 순간마다 해마를 비롯한 여러 기억 중추들이 그 자극을 과거의 기억, 감정들과 함께 양념하고 버무린다. 기억의 해석이라는 유리창을 앞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객관적인 상황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주관적 해석을 거치고, 이는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뇌과학적 귀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의 해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나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하는 것을 안다 해도 김부장의 메시지를 볼 때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짜증이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리적 원인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이, 나의 감정이 내 기억과 해석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는 것이, 마구 짜증을 부리고 있는 스스로를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성찰하는 데에는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괜히 화가 나고 열이 뻗치는 스스로를 좀 더 이해하고 달래주기 위한 성찰 말이다.

이미 지나간 일들의 스트레스들마저 끌어와 지금의 불필요한 짜증으로 키워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기에는 당장 눈앞에 닥쳐있는 일들만 해도 너무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쓸데없이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별일 아닌 일에도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아마 당신의 해마에게도 조금의 휴식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힐링이 필요한 때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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