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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내 마음] 28. 조재범 사건으로 본 그루밍 성폭력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01.14 03:20

[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국가대표 쇼트트랙 선수인 심석희 씨에 대해 코치인 조재범 씨가 성폭행을 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심석희 씨 측 주장에 따르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성폭행이 있어왔다고 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로 스포츠 스타였던 그녀에게 미성년자였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상습적인 성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이 크다.

이렇게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스타조차도 오랜 기간 동안 당하고만 있었다는 사실이 ‘도대체 왜?’라는 의문을 함께 던져준다.

‘만약 그렇다면,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운동선수들에게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끔찍한 상상도 함께 따르게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스포츠 스타가 그동안 왜 당하고만 있었던 것일까?

최근 나온 기사에 따르면 심석희 씨에게 일어난 일들이 그루밍 성폭력으로 의심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그루밍 성폭력의 특징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석희 사건을 통해 그루밍 성폭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루밍 성폭력의 사전적 의미는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보통 어린이나 청소년 등 미성년자를 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이뤄지는데,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당시에는 자신이 성범죄의 대상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루밍 성폭력은 사전적 의미에서도 드러나듯이,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자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드러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 특징이 있다.

왜 그러한 특징을 지니게 되는지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보다 깊은 내면적 의미를 살펴보기 이전에 표면에 있는 문제부터 살펴보고 깊은 곳의 의미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_픽사베이


심석희 사건에서 보듯이, 가해자는 피해자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지고 있다.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고 운동선수가 그 바닥에서 더 이상 발을 못 붙이게 된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보다면 운동선수 당사자에게는 커다란 공포일 것이다. 그 말은 쉽게 입을 뗄 수가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사실 ‘우리나라가 모든 일들이 합리적으로 해결이 된다.’라는 믿음만 깔려있다면 그 공포의 정도가 덜 할 터이다. 하지만 필자도 그렇고,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 특히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의 정도가 그렇게 공고하지 않다.

‘초중고등학교 때는 분명 세상이 합리적이라고 배웠던 거 같다. 하지만 경험이 축적될수록 세상이 돌아가는 게 그렇게 합리적이지가 않더라.’라는 것이 또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심석희 사건에서 현실적인 문제는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스케이트만 신어 온 운동선수가 그 바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금메달을 딴 스포츠 스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한 감정적 경험을 해보지 않고, ‘왜 그동안 말이 없었어?’라고 비난을 하는 것은 이 사건의 본질에 대한 커다란 이해 부족이 밑바탕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있어야만 그루밍 성폭력이 성립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루밍 성폭력의 사전적 의미에서 보듯이 대부분은 대상이 미성년자이다. 미성년자의 심리적 특징을 이해해야만 그루밍 성폭력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5번째 연재에서 SKY 캐슬 드라마를 통해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욕망을 투사하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투사받은 욕망을 내재화하여, 그 순환 고리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다.

문제는 ‘이런 순환 고리가 부모-자식 관계에서만 유효할까?’라는 점이다.

분명 어린아이는 부모라는 존재가 생존에 절대적이다. 지금 환경에서 생각해보면, ‘부모 없이도 복지체계가 갖추어져 있어서 생존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느냐?’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은 ‘here & now’에서 생성되지 않았다(8번째 연재 내용 참조). there & then에서 형성된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분명 진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복지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던 환경은 일이백 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아이들은 부모의 support가 전제되지 않으면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추가로 중요한 점은 ‘우리는 부모를 어떻게 알아보느냐?’라는 문제이다.

우리는 ‘나의 부모’인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탐지 sensor가 탑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보면. 출생 후 자식이 바뀌는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스카이 캐슬에서도 혜나는 엄마의 유품을 확인하기 전까지 강준상 교수가 자신의 친아버지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진화적으로 봤을 때 우리 조상들은 공동 육아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 어른들은 집에 머물러있기보다는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을 터이고, 또한 야생 상황에서 사고로 죽는 확률도 높았을 것이다. 결국은 집단 내에서 공동 육아 시스템은 필수불가결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친부모만 고집하는 심리 기제를 가지는 게 그렇게 유리하지 않았다.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주양육자에 대해 의존하고, 또 가능한 한 많은 어른들에게 의존할 수 있는 심리 기제가 생존에 유리한 환경이었다는 말이다.

아이들은 실제로 그러하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선생님에게, 더 나아가서 주변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우리 진화 역사에 의해 그러하게 형성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기제가 그루밍 성폭력의 본질에 들어가 있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않고, 어른의 관점으로 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른의 관점으로 법적 판결을 하게 되면, 잘못된 법적 판결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루밍 성폭력과 관련하여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우리에게는 아이들의 심리에 대한 기저의, 진화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진_픽사베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어른은 (진화적 관점에서 봤을 때, 자신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적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절대적 존재와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들이 사고하는 패턴을 한 번 더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 이 내용은 10번째 연재에서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를 통해 한 번 살펴보기는 했었다. 아이들은 (진화적 의미에서) 절대적 존재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그런데 원인은 둘 밖에 없다. 절대적 존재의 탓이거나, 내 탓이거나. 그런데 ‘아이의 입장에서는 전자(절대적 존재 책임)의 결론이 편할까, 후자의 결론(내 탓)이 편할까?’라는 문제이다.

언뜻 봐서는 내 탓이 아니니까 남 탓으로 돌리는 게 더 편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관점은 다르다. 아이들이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절대적 존재의 탓으로 돌리게 되면, 합리적인 행동은 그 절대적 존재를 떠나는 것이 된다. 힘으로 이길 수는 없으니 떠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그 선택은 죽음의 공포와 맞닿아 있는 감정을 끌어온다. 진화적으로 봤을 때 주양육자의 탓으로 돌리고 주양육자를 떠났던 개체들은 야생 밀림 속에서 100% 사망이었다. 현시대 인간에게는 그러한 심리 기제는 탑재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절대적 존재와 문제가 생기면 ‘내 탓’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그게 그나마 감정적으로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절대적 존재와 문제가 생겨도 내 탓으로 돌리고 만다. 그래야 그 절대적 존재 옆에 계속 있을 수 있으니까.

이러한 심리 기제들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에 그루밍 성폭력들이 교묘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어렸을 때 함께 했을수록, 오랜 시간 함께 했을수록 이러한 심리기제들은 더 강하게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진화심리학적인 이해는 무척이나 중요한 거 같다.

많은 그루밍 성폭력 사건에서 ‘어른들의 관점’에서 ‘넌 왜 그렇게 행동했니?’라는 식으로 접근을 하게 된다면 많은 그루밍 성폭력 사건들이 무죄가 될 수밖에 없다.

미성년자는 미성년자로서 보호될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하다. 그 기저에는 위에서 기술한 진화심리학적인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은 그냥 그렇게(自然) 과거로부터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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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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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다빈 (비회원) 2019-01-14 17:38:55

    심석희 사건보다는 조재범 사건으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정신과 의사이시니 사소한 워딩이 끼치는 사회적으로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주목했을 때 피해자의 심리와 정신건강이 어떻게 될 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삭제

    • 궁금 (비회원) 2019-01-14 12:24:41

      그렇다면 현대 법 체계에서 그루밍 성폭행이냐 아니냐를 구분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것인가요? 미성년자와 사귀거나 관계를 가지면 무조건 그루밍 성범죄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무슨 기준으로 이것을 나뉘어야 할까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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