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유" 25.
정신과 의사가 본 SKY 캐슬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제가 두 번째 연재에서 한 번 언급을 했었던 내용인데요. 연재 중반부에 더 깊게 다뤄보겠다고 하였지만, 그냥 넘어갔네요.

그런데 얼마 전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또 다시 한번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가 뇌리에 박혔습니다.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자크 라캉이 이야기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명제와 너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사진_jtbc


사실 욕망의 경계가 흐려지기 가장 쉬운 관계가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드라마가 ‘SKY 캐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드라마를 보면서 제 학창 시절도 스멀스멀 떠오르더라고요. 제게는 완전히 다른 사람 이야기로 다가와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필자의 집이 부자여서는 아니고요(오히려 경제적 문제로 인한 아픔이 더 있어요^^;;).

그 부모, 자식 관계에서 욕망의 경계가 흐려진 점, 부모의 욕망을 과도하게 짊어지면서 허덕거렸던 부분들이 남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사는 게 무지 힘든 사람이었거든요. 드라마에서 영재가 썼던 일기 내용들이 100%는 아닐지라도 제게는 많이 다가왔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영재 부모님이랑 필자 부모님은 전혀 다른 캐릭터입니다. 아래에 기술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의 순환 고리에 있어서 영재와 유사한 경험을 하였고, 그로 인한 힘듦이 제게는 무척 컸었습니다. 영재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었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제가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과 질환이 있는 환자를 보는 일이 아닌, 정신과 질환이 없는 일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공언하고 다니는 것도 ‘과거의 저’에 기인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꼭 병이 있어야만 힘든 건 아니더라고요. 많이 힘들었던 제가 조금씩 편안해지다 보니, 저와 비슷한 사람들을 돕고 싶은 게 저의 마음인 거 같습니다. 오늘은 제 이야기부터 주절주절 써졌네요. 무엇보다도 제 진심이 조금이라도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놔 있다 보니, 글이 이렇게 전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제 진심이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저는 이 명제가 우리의 인간관계를 모두 설명해줄 정도로 강력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부모, 자식 관계에 초점을 맞춰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부모의 입장에서 한 번 보도록 하지요.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자식에게 과도한 욕심을 가지곤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사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simple하기는 합니다. 여기서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유전적 근친도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어머니와 아들로 심플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 봐보지요. 어머니 입장에서 본인 스스로는 유전적 근친도가 1입니다. 완전히 같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유전적 근친도가 0.5입니다. 어머니 유전자의 반이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뜻입니다. 나머지 반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지요.

자 여기서, ‘이기적 유전자’ 입장에서 보면 근친도가 0.5인 아들에 투자하는 것보다 근친도가 1인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 유리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관찰되는 모습과 불일치해 보이죠?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출구’라는 개념입니다. ‘출구’는 유전자가 스스로를 복제해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의미라고 생각하면 무방합니다.

조금 느낌이 오시나요?

어머니 입장(사실은 ‘어머니 유전자 중 하나인 A입장에서’가 더 맞는 표현이기는 합니다)에서 자신 스스로가 아무리 근친도가 1이더라도 출구가 많이 좁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복제해서 다음 세대로 넘겨줄 기회가 많이 줄어들어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근친도가 0.5이지만 출구가 넓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복제를 통해 다음 세대로 넘어갈 수 있는 확률이 자신을 통하는 것보다 아들을 통하는 것이 훨씬 높다는 뜻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많은 욕심을 투사하는 것을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원리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더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기는 하지만, 연재에서는 여기까지만 설명하는 것으로 하지요. 결론은 부모가 자식에게 많은 욕심을 투사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이해해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자연의 순리이지요.

물론 자연의 순리이니까 따르자는 건 아닙니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를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가 인간이라고 했으니까요(신기하고 재미있는 건 SKY 캐슬 드라마에서도 ‘이기적 유전자’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부모가 자식에게 많은 욕심을 투사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도움이 된다면 자연의 순리에 따르면 될 일이고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내용을 명확히 파악하고 거스를 수 있는 힘을 가지면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SKY 캐슬 드라마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당연히 후자가 필요하겠지요?
 

사진_픽사베이


진화적으로 부모가 스스로에게 투자를 하는 것보다 자식에게 투자를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심리적인 문제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앞 연재에서 ‘강식당’에 나오는 ‘안재현’씨가 ‘밥이 빨리 되었으면 하는 욕심’을 ‘전기밥솥’에 투사하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였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없는 것은 원하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드렸었고요. 그런데 전기밥솥은 명백합니다. 내가 어떻게 욕심을 투사하더라도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런데 사람 관계는 좀 복잡합니다. 내가 욕심을 타인에게 투사하면 그것이 타인에게 영향이 가서 타인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가 적게나마 있습니다. 물론 부모, 자식 관계에서는 그 영향이 훨씬 클 수 있지요.

사실 이런 복잡한 문제 때문에 부모들은 자식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를 합니다. 그리고 자식은 그 욕망을 내재화하여 부모의 욕망에 맞추곤 하지요. 아이들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연결고리가 순환이 되어서 돌아가기 시작하면 부모, 자식 간에 욕망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순환구조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것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과유불급이듯, 지나치게 되면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SKY 캐슬’에서 나온 비극들을 보듯이요. 저는 이런 과한 욕망의 투사를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덮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랑’보다는 ‘욕망 폭력’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의제 설정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미명이 붙는 순간, 그것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이해해주어야 할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놔두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이 순환구조 속에서 많이들 허덕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KY 캐슬’에 나온 영재 엄마와 영재의 대사가 그 순환구조의 본질을 잘 나타내 준다고 생각합니다.

영재 엄마: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여태 저 하나 보고 살았는데...

영재: 더 이상 지옥에서 사는 거 싫어. 당신 아들로 사는 거 지옥이었으니까.

물론 ‘SKY 캐슬’ 드라마가 극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부분은 분명 있지만, 그 속에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진실은 ‘사랑’이라는 미명에 덮어진 ‘욕망 폭력’이라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분명 폭력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어른들... 이건 분명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서진(염정아 분)이 영재를 진정시키면서 했던 대사들이 그 착각들을 절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한서진: 자식 잘 되라고 앞에서는 모질게 굴어도 돌아서면 우는 게 엄만데... 명주 언닌 자기 목숨보다 널 더 사랑했어. 영재야.

영재: 그깟 대학 안 간다고 죽어? 엄마 뜻대로 안 산다고 죽어?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날 두고 죽어버리는 게 어떻게 사랑이냐고.
 

사진_픽셀


드라마 대사로 느껴보시면 조금 더 와 닿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욕망 폭력’에 희생되는 아이들이 줄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욕망 폭력에 대해서 스스로 깨닫고 해결해 가야 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보다 더 힘이 강한 게 어른이니까요. 어른의 노력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 번째 step이 스스로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욕망 폭력’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한서진’처럼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이상 그 어떤 변화도 시작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난다면, 그다음 step으로 필요한 것이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게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빠지는 오류인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오류에 빠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면 사랑, 네가 하면 욕망폭력’ 이렇게 내 일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이 욕망폭력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자식이 ‘잔소리’로 느낀다면, 그것은 ‘욕망폭력’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욕망폭력과 사랑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할 테니 참고해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욕망폭력과 사랑은 한 끗 차이이거든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있다는 뜻이지요. 조금씩 찾고 인지하는 노력부터가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필요한 것이 ‘어떻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 상 다음 연재에서 이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자식에 대한 욕심을 버려라.’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식은 ‘전기밥솥’이 아니니까요. 욕심은 필요합니다. 그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욕망폭력’과 ‘사랑’은 한 끗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그 한 끗 차이를 깨닫고 나아간다면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고, 그 한 끗 차이를 모르고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나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욕망폭력’에서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는 마법의 다리를 교육 코디 역인 김주영 선생님이 알려주더라고요. 드라마에서는 악역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답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신가요? 하지만 저는 답이 거기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마법의 다리를 다음 연재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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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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