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위 그림을 빨간 사각형이라고 설명하면서 빨간색과 사각형에 대해 묘사한다면, 듣는 사람들은 모두 의문의 여지없이 내용을 받아들이고 사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위 그림의 실재가 아래와 같았고, 그중 일부를 설명한 것이라면, 화자가 했던 설명을 정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볼 수 있을까?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언론의 무지막지한 힘이다. 세상은 정육면체보다 훨씬 더 복잡하기에 모든 면을 다 드러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세상의 일부를 세상에 내놓아야 할 텐데, 이것이 언론이 하는 역할이다. 그러면 언론은 다양한 색깔의 정육면체를 언제든 빨간 정사각형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이 된다. 언론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을 했다고 해서 사실이 아닐 수 있는 이유다.

최근 경찰국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다. 이런 타이밍에 내놓는 경찰과 관련된(경찰국과 직접 관련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뉴스들은 저 빨간 사각형과 같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경찰의 숫자는 약 12만 6천 명이다. 이 안에 얼마나 다양한 색깔들이 존재할까? 그런데 이 안에서 좋은 색깔만 꺼내서 보여 준다면? 나쁜 색깔만 꺼내서 보여 준다면? 언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줬을 뿐이라고 항변하겠지만, 다양한 색깔의 정육면체를 빨간 사각형으로 만드는 건 언론의 책임이다. 여기에 언론의 사적인 의도가 자꾸 들어가기에 사람들은 점점 언론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언론은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뻔히 알고 있다. 각 언론들이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을 믿어 주고, 언론이 더 배부를 수 있도록 일반 국민들이 도와주는 건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긴 꼴이 되는 것이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화제를 선택하는 권력이 언론에 있어 가장 강력한 힘이기는 하지만, 같은 화제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숨겨진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숨겨져 있기에 더 교묘하고 사람들이 쉽게 알아채기 힘들기에 관련한 지식을 쌓아 둔다면 방어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관련하여 몇 개의 실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실린 의학 논문이다. 폐암에 걸린 것을 가정하고 외과 수술을 받을지, 방사선 치료를 받을지를 선택하는 실험이다. 많은 실험이 그렇듯 두 그룹으로 나누고 각각의 그룹에 질문의 형태를 달리하여 제시했다. 

 

<그룹 1>

외과 수술을 받은 환자 100명 가운데 90명이 수술에 성공했으며, 일 년 뒤의 생존자는 85명, 5년 뒤의 생존자는 34명이었다. 한편 방사선 치료를 받은 환자 100명 중에서 100명이 무사히 치료를 마쳤으며, 일 년 후의 생존자는 77명, 5년 후의 생존자는 22명이었다. 당신은 어떤 치료법을 선택하겠는가?

 

<그룹 2>

외과 수술을 받은 환자 100명 가운데 10명이 수술 중에 사망했고, 일 년 후에는 15명이, 5년 후에는 66명이 사망했다. 한편 방사선 치료를 받은 환자 100명 가운데 치료 중에 사망한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1년 후의 사망자는 23명, 5년 후의 사망자는 78명이었다. 당신은 어떤 치료법을 선택하겠는가?

 

 두 질문의 수치를 보면 알겠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정확히 일치한다. 생존자 수로 표현한 것과 사망자 수로 표현한 표현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실험 결과는 '그룹 1'에서나 '그룹 2'에서나 동일한 선택을 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우리의 예측과 달랐다. 생존자 수로 표현을 한 '그룹 1'에서는 82%가 외과 수술을 선택했지만, 사망자 수로 표현을 한 '그룹 2'에서는 56%가 외과 수술을 선택했다. 표현 방식만 바꿨을 뿐인데 26%의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다는 말이다. 

 이 실험의 결과를 본다면, 언론은 얼마든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신의 숨겨진 의도를 일반 시민들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위와 같은 칼을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이다. 생존자로 표현을 하나 사망자로 표현을 하나 사실을 왜곡하는 부분은 전혀 없기 때문에 언론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스스로 이러한 부분들을 잘 인지하고 그 표현 안에 어떠한 의도가 담겨 있는지를 잘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비슷한 실험이 하나 더 있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룹 1>

 치료하지 않으면 사망하는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가정하자. 기존 약은 사망률을 0.06%까지 낮추며, 가격은 30만 원이다. 그런데 제약 회사에서 사망률을 0.03%까지 낮춘 신약을 판매하려고 한다. 당신은 이 신약을 사기 위해 얼마까지 지불할 의향이 있는가?

 

<그룹 2>

 신약은 사망률을 100만 명에 600명을 300명까지 낮춘다. 당신은 이 신약을 사기 위해 얼마까지 지불할 의향이 있는가?

 

 이 두 질문은 정확히 같은 내용이다. 100만 명 중 600명이 0.06%이고, 100만 명 중 300명이 0.03%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같은 금액을 지불을 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룹 1'에서는 평균 34만 원, '그룹 2'에서는 평균 58만 원까지 지불할 의향이 있다고 대답을 했다.  

 0.06과 0.03은 작은 숫자여서 크게 다가오지 않는데, 600과 300은 상대적으로 큰 숫자여서 사람들에게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룹 1'에서는 ‘차이가 0.03이네.’라고 받아들이지만, '그룹 2'에서는 ‘약으로 인해 300명이나 더 살 수 있다고?’가 되는 것이다. 실제 내용은 같지만 표현 방식의 변주를 주게 되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실험 말고도 비슷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언론이 ‘책임 회피 가능한 조작(?)’을 수도 없이 많이 자행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우리가 주체적인 판단을 하는 데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 성숙한 시민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뻔한 말처럼 많이 알수록 그들에게 농락당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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