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서른 초반의 여성입니다. 요즘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제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내년 중에 외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영주권 준비도 하구 있고요. 근데 사실 이것 또한 제가 원하는 삶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삶을 살다 보니 공허함은 늘어가고, 행복을 느끼는 감정도 자꾸 작아집니다. 무료함을 자주 느끼고 말 그대로 재미가 없어요.

친구들은 하나 둘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을 하는데, 저는 왜 선택하는 남자마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만 선택하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빠의 영향일까요?

어릴 적 부모님이 매일 싸우셨고, 아빠는 병적으로 바람을 피우셨습니다. 가정에 매우 소홀하신 분이었고 고등학교 때까지 가정형편도 어려웠고,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엄마와 언니와 살았습니다. 인생에 살면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마음은 편했었죠.

이후 성인이 되어서도 여러 남자들을 만났고, 다들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폭력적인 남자 , 바람과 거짓말을 하는 남자, 착한데 빚이 있는 남자, 돈은 있는데 우울증을 갖고 있는, 좋아는 하는데 사귀지는 말자는 남자...  이런 남자들을 선택하는 제가 싫어 이제는 연애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이런 사람들을 선택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선택해서 시간을 허비하는 걸까요.

 

자꾸 남과 저를 비교하면서 제가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외국에 가는 것도 사실 어느 정도는 가면 조금 더 좋은 인생을 살지 않을까 싶어서 가는 것도 있습니다.

너무 지칩니다. 우울증인가요? 이젠 힘듦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들 나이 먹으니 본인들 인생을 살기도 바쁘고, 말한다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또 본인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느낄까 싶어 말을 안 하게 되다 보니 이제는 연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말을 안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좋아는 하는데, 사귀지는 말자는 남자는 아직도 연락합니다. 끊어내려 했는데 공허하고 외로워 다시 연락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이 시큰둥한데도 그냥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위로를 스스로 합니다. 나보다 아픈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많다고 다들 비슷하게 산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 다시 일어나려 합니다. 근데 자꾸 외롭습니다. 근데 자꾸 그런 선택을 하는 제가 싫습니다.

아빠에 대한 상처 때문일까요? 전 왜 자꾸 나쁜 남자 아니면 불행을 안고 있는 남자만 선택할까요. 이런 제가 너무 싫습니다.
 

사진_픽셀

 

답변) 

성장과 발달이라는 말은 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도 성장과 발달을 하죠.

젖먹이일 때는 부모님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 발달이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발달입니다. 또 성인이 돼서는 경제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부모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발달이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동시에 사랑받는 것이 발달입니다.

 

키가 크고, 체모가 생기는 등 신체적 발달이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죠. 물론 의학적인 기전이 다 있지만, 보통은 그냥 때가 되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죠.

정신적인 발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적당한 스트레스 상황을 겪으며 성장한 사람들은, 친구 관계, 연인 관계, 결혼, 자녀 양육을 순차적으로 진행해 나갑니다. 이런 정신적 발달은 개인의 의지의 영향도 받지만, 비슷한 연배의 또래 집단 영향도 받죠. 주변에서 다 애인이 생기고 결혼을 하면, 그렇지 못한 내가 뒤처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 바로 이런 영향입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지 못한 분들은, 정신적 발달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질문자 분의 아버님이 바람을 피우고, 경제적인 지원도 하지 않으셨던 분이셨죠. 부모에 대한 신뢰, 성인에 대한 신뢰, 남자에 대한 신뢰 이 모든 부분이 상당히 약해지셨을 거예요.

부모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게 되면, 그 부모가 만든 자식인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약해지게 됩니다. 정말 별로인 아버지의 절반이 나에게 있으니까요. 이는 자기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믿게 만들죠.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믿음이 생기면, 사랑을 하는 것도, 사랑을 받는 것도 어려워집니다. '나 같은 존재가 저런 사람과 관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이런 생각은 결국,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좋은 사람을 멀리하게 만들죠. 동시에, 누가 봐도 나쁜 사람을 만나면서,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나쁜 사람이더라도 그 사람을 벗어날 수 없게 합니다. 왜냐하면, 무가치한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우연히 좋은 사람이 나와 관계를 원한다 한들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저런 사람의 호의를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또는 '뭔가 나에게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에 호의를 보이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죠. 결국 좋은 사람의 호의를 밀어내게 됩니다. 

성인에 대한 신뢰도 비슷합니다. 다른 성인들을 믿을 수 있다 없다는 것을 떠나, 먼저 자기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의 삶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죠.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삶에서 봐온 성인의 삶이 늘 고통스러웠으니까요. 성인이 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긍정적인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인생은 우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이 힘들더라도,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라는 기대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니까요. 

 

남자에 대한 믿음은 얘기가 조금은 복잡합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질문자 분이 겪고 있는 현상을 '불에 뛰어드는 나방' 같다고 예를 들곤 합니다. 전문용어로는 '반복 강박'이라고 하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상황을 다시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자기 자신이 뛰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들로,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남성을 선택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선택한 남성에게 결국 다시 상처 받게 되고, 그 상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더 확신하게 만들죠. 그 확신은 다시 잘못된 남성을 선택하게 만들고, 상처를 다시 받는 일이 계속 반복되게 됩니다. 악순환이죠. 

이런 현실을 피하기 위해 사람은 본능적으로 환경을 바꾸려 합니다. 반복되는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이고, 환경을 바꾸는 것은 쉬워 보이니까요. 

한국이 아니라 캐나다로 거주지를 바꾸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환경을 바꾸려는 시도로 느껴져서 걱정입니다. 상황이 잘 풀린다면 다행이고, 저도 잘 풀리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나쁜 사람만 만날 수 있는 존재라면, 어디로 가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상황이 호전되기는 쉽지 않겠죠. 

 

다행히 캐나다에 가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네요. 그 기간 동안 정신과 전문의에게 상담 치료를 받는 것을 권합니다. 상담 치료는 언어 의존적이기 때문에, 모국어로 치료를 받아야 가장 효율적이라, 외국에서 받는 것보다는 국내에서 받는 것이 효과적일 거예요. 

6개월의 기간은 상담 치료를 받기에는 긴 시간이 아닙니다. 교과서 적으로는 정신분석적 정신치료를 받으셔야 할 상황인 것 같지만, 이 치료는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해서 현재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치료 목표에 대해 전문의와 상의하신 후에, 현명히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갈 가정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질문자 분은 불행히도 어려운 가정에서 성장하셨죠. 그래서 정신적인 아픔을 겪고 계시고요. 따라서 정신적인 아픔을 겪는 것이 질문자 분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죠.

내 잘못이 아니기는 하지만, 아픔이 내 인생을 망치고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을 위해서 내가 노력해서 아픔을 치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직 남은 인생이 기니까요. 그래서 제 지인 중 한 분은 정신치료를 라섹이나 라식 수술에 비유합니다. 받기 전에는 얼마나 좋은 지 모르지만, 받고 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게 되니까요. 그러니 꼭 정신과에 한 번 방문해 주세요.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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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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