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정체성을 잃은 것 같아요.

스무 살 초반, 생각이 자라기 전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던 제 모습과 행동들이 마음에 안 들기도 했고, 목표를 위해 지내던 중에 감정적으로 동요되는 것이 사치라고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기쁠 때도 불안하고, 슬퍼하거나 우울한 거 같은 느낌도 부정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느끼면서 항상 같은 감정, 같은 모습, 그대로 시간만 압축돼서 흘러가길 바라면서 4년 정도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 영향인지 모르겠는데 요즘 들어 감정을 잃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혼자 있으면서 이게 우울한 건지 외로운 건지, 우울함과 외로움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감정을 내보일 상황 전에 먼저 스스로 묻고, 항상 그전에 내가 생각하는 상식과 가치관에 의해서 먼저 판단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불쾌한 상황에서 ‘이건 화를 내야 하니, 화를 내야 되는구나.’ 생각을 하고 화를 내려고 하니 어색해서 화도 잘못 내고 화도 잘 안 나고, 어떤 선물을 받을 때도 분명 기뻐해야 할 상황인데 어떻게 기쁨을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억지로 기쁜 반응하는 것도 어색하고, 슬픈 상황이 와도 슬픈 거 같은데 슬퍼하고 싶은데 그러한 생각이 드는 순간 항상 3자 입장에서 저를 봐서 다시 0으로 되는 느낌이 드네요. 그렇다고 속 안에 억울함이나 화는 없는 것 같아요.

어떠한 감정이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3의 눈으로 저를 보고 다시 원래대로 가고 제 생각에 의해서 감정을 만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 감정에 제가 눈치를 보는 느낌입니다. 외람되지만 느껴지는 고통 또한 점점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냥 내가 아픈 거구나.’ 하고 감정 동요 없이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표면적인 느낌 그대로로 받아지더라고요.

감정 변화도 없고 감정적으로 무뎌 왔어서 항상 상식을 따르고 누가 봐도 좋은 행동, 좋은 말등을 행하고 따라가면 됐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내 본심에 의한 진심인 건지, 그러한 것들도 위선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건 분명한데 이러한 것들이 가식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드니 혼란스럽습니다.

어느샌가 사람들 간에 관계서도 깊은 감정을 교류하는 사이보단 적절한 거리를 두고 만나는 게 편하고 그게 좋더라고요. 오랜만에 걸려오는 친구나 지인들이 전화 오는 것도 부담스럽고 만나는 친구는 여자 친구뿐이고 나머지는 거의 혼자 있습니다. 혼자가 편하고 좋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러한 성격을 하나의 캐릭터로 봐도 되는 건지, 아니면 고쳐야 할 부분이 있는지, 나도 모르게 내 본모습을 억누르고 있는 건지 방향성을 잡고 싶어서 문의드렸습니다.
 

사진_픽셀

 

답변) 

시험 준비를 하거나, 취업 준비를 하거나, 직장에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사업이 어려워지는 등의 힘든 상황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는 상황에서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이 상황을 견뎌내려고 합니다. 현재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거나, 먼 미래에 자신이 누릴 기쁨을 상상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쯤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아하는 운동이나 취미를 하는 소소한 시간을 가지거나 이런 것들이죠. 하지만 정말 어려운 상황인 경우에는, 이런 방법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감정과 생각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분노, 우울, 불안 같은 원초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너무 격렬해지면 이 감정을 느끼는 자체만으로 피곤해지고, 진이 빠지죠. 애인이나 가족과 격렬하게 말싸움을 하고 난 뒤 방에 들어와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스트레스 자체를 피하거나 조절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방법은 감정 자체를 인식하지 않고, 무시하고, 내 생각으로부터 분리시키게 됩니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면, 무덤덤하게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정말 힘든 상황에서만, 일시적으로 써야 하는 방법입니다. 오른팔에서 출혈이 심해서, 팔뚝을 강하게 묶어 지혈을 한 상황과 비슷하죠. 당장은 출혈을 막을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피가 통하지 않아 팔이 썩어 떨어져 나가겠죠. 피가 공급이 되지 않으면, 처음에는 팔이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팔에 있는 신경마저 썩기 때문에 점차 통증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통증뿐, 팔이 점점 썩어 떨어지게 되죠.

과거에 어떤 어려움 때문에 감정을 분리시키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정이 동요되는 것이 사치라고 까지 느껴지셨다면,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겠죠.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동요되니까요. 하지만 현재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편안함을 느끼는 과정은, 위에서 비유했듯이 신경이 썩어 통증만 느껴지지 않게 된 상황과 비슷합니다. 팔이 계속 썩고 있듯이, 정신이 감정과 사고가 분리돼가고 있죠. 감정을 제3의 눈으로 보듯이 느끼는 것이 이런 과정을 겪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애인과 관계가 유지가 될 만큼의 감정은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다행이에요. 하지만 감정이 점점 더 느껴지지 않을수록,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도, 새로 시작할 수도 없으실 겁니다. 물론 혼자서 사는 것을 선호하는 분도 있죠. 그런 분들에게는 이런 것이 큰 문제는 아닐 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역시 망가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싫어하는지, 하고 싶은지 같은 욕구는 모두 감정적인 것입니다. 욕구가 먼저 생기고, 머리가 그럴듯한 이유를 만드는 것이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조차 느낄 수 없게 되는 삶을 원하시는 분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질문자 분도 이런 내면의 문제들을 느끼셨기 때문에, '내가 정체성을 잃은 것 같다.'고 표현하신 듯합니다.

과거에 비해 현재 상황이 개선되셨다면, 굳이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겠죠. 결국은 본인에게 해가 되니까요. 감정을 다시 되찾는 것이 필요한 단계인 것 같고, 혼자서 감정을 찾는 것이 어려우시다면 정신과 전문의의 정신치료 같은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굳이 전문의를 권고하는 이유는, 감정을 되찾기 시작하는 초반에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울한 감정을 못 느끼고 있다가, 감정을 찾아가면서 다시 우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 충격이 클 수 있죠. 이런 상황에서는 급히, 일시적인 약물 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질문자 분이 신뢰할 수 있는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함께 노력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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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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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도움됩니다. 조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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