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요 몇 달 사이 마음이 괴로워 조언을 구하고자 글을 써봅니다. 저는 20대 중후반 여성으로, 남자 친구가 계속 싫었다 좋았다 반복되는 극단적인 감정을 겪고 있어 괴롭습니다. 남자 친구와 몇 년 동안 사귀었는데 그런 감정 기복이 없었다가 몇 달 전부터 시작된 증상이에요. 항상 저의 심한 기복과 짜증을 받아주던 남자 친구가 최근 들어 사업을 시작하고 바빠지면서부터 제게 '더 이상 내게는 너의 찡찡거림을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라고 한 뒤부터 이런 감정 기복이 시작된 것 같아요. 일반적인 감정 기복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괴롭습니다. 할 일이 많은데도 하루 종일 이런 생각으로 집중하기가 힘들어요.

이를테면 어제는 '남자 친구랑 역시 헤어지는 게 맞겠지'하고 펑펑 울고 가슴 아파하다, 또 남자 친구를 막상 만나면 '그래 참 좋은 사람이야. 결혼해야지' 이런 게 불과 하루 이틀 단위로 계속 반복됩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찰 때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리고 약간 '미칠 것 같은' 느낌까지 들면서 토할 것 같고 많이 답답합니다. (제가 1년 정도 공황장애 약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아주 조금 비슷한 느낌의 답답함이에요)

이런 기분이 심해질 때마다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남자 친구에게 '너의 이런 점 때문에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다', '너의 행동 때문에 섭섭하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남자 친구가 본인도 지쳤다는 식의 대답을 하면 또 헤어지자고 할까 봐 두려워서 다시 아닌 척하고. 이런 이야길 계속하는 게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런 패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생각을 또 혼자 하다 보면..... 이게 정말 나만의 정서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내가 이 사람의 단점을 끌어안고 갈 자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의 문제인지의 문제도 섞여있는 것 같아 머리가 더 복잡하고 아프고 그래요. 남자 친구의 단점이 없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면 또 괴롭고... 결정을 못하겠어요.

다시 병원을 가보아야 하나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데, 약을 먹는 건 또 싫고 그래서.. 이대로 있기에는 헤어질 수도 없고, 헤어지고 싶기도 하고.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에요..

전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이런 생각하다 보면 또 자괴감에 빠져들고, 내가 점점 작아져서 없어지는 느낌이에요. 누군가에게 자꾸 의지하려고 하는 제가 싫어요. 감사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답변) 

안녕하세요. 최근, 남자 친구와의 문제로 인해 힘든 감정을 많이 느끼셔서 사연을 남겨주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이성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누구나 이성 관계 문제에서 어려움을 느끼기에 이성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은 글쓴이 분만의 문제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자꾸 의지하려 하는 게 싫다고 하셨는데, 저는 의지를 해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듯이, 정신과 의사들도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이혼율이 높은 직군 중에 하나일 정도로요. 이미 정신과에 방문해보신 경험도 있으신 것으로 보여, 그래도 다른 분들에 비해서는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하는 것에 거부감이 덜 드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말씀해주신 내용은 약물 치료보다는 상담 치료가 필요한 사안으로 보입니다. 약물 치료를 주로 하는 병원보다는 psychotherapy를 전문으로 하는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을 해보시면 어떠실까 싶습니다. 꾸준히 상담을 받으신다면 꽤 많은 도움을 받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문의하신 내용이 글쓴이 분께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시지 않으실까 염려스럽네요. 절대 그렇지는 않으니 오해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인간관계 문제도 한쪽의 문제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쌍방과실이죠. 하지만 나 스스로가 더 쉽게 바꿀 수 있는 건, ‘남자 친구’보다는 ‘나’이기 때문에 ‘나’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더 어렵게 바꿀 수 있는 문제보다는 더 쉽게 바꿀 수 있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나에게 훨씬 이롭기 때문입니다. 남자 친구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긴 관계를 이어가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함께 상담을 받아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남자 친구가 얼마나 마음을 내주느냐의 변수가 있기 때문에 가장 바꾸기 쉬운 나부터 상담을 받아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

 

짧은 글로는 헛다리를 짚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주어진 조건 내에서 약간의 첨언만 덧붙여 보고자 합니다. 써주신 내용에서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런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라고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짧은 글로 글쓴이의 속마음까지 모두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알면서도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무의식은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구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에너지를 많이 쓰면서까지 나를 만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라는 신호로서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사실 다이아몬드가 사랑으로서의 징표로 쓰이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사랑의 징표로 쓰이는 이유는, 쓸모없고 비싸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러하기 때문에 사랑의 징표로서 신뢰도가 높게 쓰일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것에 이렇게 투자를 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신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지칠 정도로 에너지를 쓰면서 나를 만나는 것 또한 비슷한 원리로 사랑으로서의 징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들이 의식적으로 계산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들이 적절히 쓰이면 남녀관계에서 긴장감을 유발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깊어질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적절한 선을 타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문제입니다. 또 사람에 따라 그 적절한 선이 다르기 때문에 둘 사이의 궁합도 중요한 부분이고요.

 

글쓴이 분이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일반적인 정도보다 높다면, 그 내용과 관련된 상담을 받아보신다면 글쓴이 분이 한결 편해질 수 있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용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어렸을 때 충족되지 못한 애정결핍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 결핍을 현재에서 채우려고 애쓰는 노력일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긴 호흡을 가지고 상담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시지 마시고 한 번 손을 내밀어 도움을 받으신다면 더 건강한 연애를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내 고민, 내 사연도 상담하러 가기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