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관계에서 있어 어려움이 있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이웃이나 동네 아이 친구 엄마, 직장 동료 등 관계의 적정선을 모르겠습니다. 소위 남의 비위를 맞춘다고 하죠. 장점이라면 맞장구도 잘 쳐주고 이야기도 잘 들어줄 수 있는데, 제 생각 마음 등을 자신 있게 말을 못 하겠습니다. 특히 거절은 너무 어렵고요. 그러다 보니 뭔가 관계가 친밀해지기보단 수박 겉핥기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제 마음보단 상대방의 마음에 더 신경 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만나면 가족을 제외하곤 너무 피곤합니다. 관계에 있어 너무 취약하고요.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는 오너에게 엄청 이용당해 결국 몸과 맘이 너덜너덜 해져서야 사표를 쓰고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저에게 이럴 준 몰랐다며 역정 내더라고요.

누군가가 제게 그러더라고요. 착한 사람한테는 더 잘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더 이용해 먹는다고요. 착한 게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것 같습니다. 그 일 겪고 나니 더 사람을 못 믿겠고, 조금만 잘해줘도 오히려 고마워 제 역량을 넘어서 잘해주게 됩니다.

 

문제는 제 아이가 관계 속에서 당당하지 못한 제 모습을 보고 닮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관계에 있어 상처가 있는데, 그게 아직도 영향이 있는 건지... 제가 바뀌면 저희 아이도 제 인생도 좀 더 나아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관계에 있어 어디까지 받아주고 또 저를 지켜야 하는지, 그 적정선을 모르겠습니다.

저희 친정엄마는 저보다 더 자존감이 낮습니다. 당당히 주장해야 할 권리를 말하지 못하고 눈치 볼 일이 아닌데 상대방의 눈치를 보죠. 이런 엄마의 자존감이 저에게도 영향을 주었을까요?

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고 싶은데... 그래서 아이에게도 당당하고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아이로 자라게 해주고 싶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조언 부탁드립니다.
 

사진_픽사베이


답변)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과 마음을 말할 수 없게 된다면, 정말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죠. 내 인생을, 관계를 다른 사람이 주도하게 되니까요. 질문자 분도 관계를 내가 조절할 수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관계의 적정선을 고민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집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으면 적정 온도를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더우면 보일러를 끄고 추우면 켜면 되니까요. 물론 이건 제가 지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그다지 안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점은 사람은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에는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다른 사람이 주도하게 되는 것이 뭐 그리 큰일인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 다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인생 자체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미 질문자 분이 경험하셨던 것처럼, 내 윗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면 착취를 당하게 되겠죠. 아마 내 아랫사람이 나쁜 사람이더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 부모가 나쁜 사람이라면, 상황은 더 끔찍하겠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중에서는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고, 그 중간인 사람들도 있죠.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서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기만을 기도해야 한다면, 그리고 나쁜 관계를 내가 끝낼 수도 없다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렵게 되기도 합니다. 아마 질문자 분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최악의 상황은 나쁜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었을 테지요.

다른 사람은 다 거절한 그런 사람을, 자기 자신은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살아버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하지만 남편 분이 질문자 분에게 주는 고통은 없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실과, 그래도 가족에게는, 안전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질문자 분이 가졌다는 것, 두 가지 점 모두 다행이죠. 다행인 또 다른 한 가지 점은, 질문자 분이 당당히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머리로는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머리는 부당하다는 것을 아는 데 왜 행동으로 실행하지는 못 하는 걸까요? 이런 패턴을 보이는 분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자기주장을 하면 상대방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주장을 하면, 그 주장이 싫은 상대방이 떠나거나, 상대방이 상처받아서 망가져 버리거나, 내가 내 주장을 함으로써 집단 자체가 무너진다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가 손상되고 악화될 거라고 믿고 있죠.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가 주장을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은 당연히 어린 시절 가정환경이 원인인 경우가 흔합니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자기주장을 할 수 없던 상황인 경우도 있고, 부모님이 너무 무서워서 자기주장을 할 수 없었던 경우도 있으며, 반대로 부모님이 병약하셔서 어린 자식의 자기주장에 충격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인 경우도 그렇습니다. 질문자 분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부모님이 자기주장을 못하는 분이라면, 자녀들도 자기주장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죠.

반대로 말하면, 자녀가 당당하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당당하고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를 보고 스스로를 아끼는 법을 배우겠죠. 그러니 질문자 분이 먼저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방문하셔서 상담을 받으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건강한 부모님은 자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본인에게도 큰 행복이겠죠.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은 아직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은 아니죠. 하지만 본인과 자녀를 위해서 용기를 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내 고민, 내 사연도 상담하러 가기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재옥쌤 짱!"
    "정말 도움됩니다. 조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