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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or's Mail] 깊고 짙은 왕따의 흔적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8.10.29 03:57

[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우연히 네이버 메인에서 여자들과의 관계가 힘들다는 사연을 보고 저도 상담을 받아보고 싶어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우선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생활까지도 인간관계가 좋다고 말하기 힘든 생활을 해왔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친구들이랑 두루 어울리며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잘 지냈는데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심한 왕따를 당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심각하게 자살도 생각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같은 동네에서 계속 살다 보니 왕따 당했던 애라는 소문이 퍼져 중학교에서도 겨우 사귄 친구들과 멀어지는 일이 생겼고,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로 지내던 친구들과 멀어지는 일이 생기곤 했습니다. 보통 멀어지게 되는 이유는 “너 옛날에 이랬었다며?”라는 허위소문에 의한 것이었고, 실제로 친해진 친구들은 “너 소문이랑 성격 너무 다른데?”라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대학에 와서는 동기들 그리고 선배님들과 잘 지내보고 싶어 연락도 잘 주고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한 선배랑 오해가 생겨, 학과 전체에 제가 그 선배에게 꼬리 쳤다는 거짓이 퍼져 결국에는 지금까지도 과 사람들이랑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살면서 이런 일을 계속 겪으니 사람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실제로 친한 친구들이 몇 명 있긴 하지만 완전히 믿는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학교가 아닌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만난 사람들과는 매우 잘 지내고 있는 편입니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고, 시간을 내 만나기도 하고, 일부러 연락을 해 안부를 묻기도 하는 사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상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라는 생각이 너무 깊고, 짙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기 바쁘고, 그래서 사람들과 따로 만나 시간을 쓰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집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크게 불편하거나 힘들거나 한건 아니지만 계속해서 좋지 않은 관계가 계속되다 보니 곧 취업하게 되면 회사에서도 문제가 생길까 덜컥 겁부터 나는 건 사실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람을 만나고 대하고 지내고 싶은데 사람을 가까이에 두고 지내고 싶지 않은 제가 이상한 걸까요?

사실이 아닌 소문에 의해 꽤 많이 힘들어했던 제가 너무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 글 남겨 봤습니다. 제가 잘못한 행동이 분명 없지 않았겠지만 그 어릴 적 이유 없이 당했던 왕따에 의해 지금까지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게 너무 속상한 마음이 드네요. 이제는 새로운 사람과의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 걸 아예 꺼리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최대한 멀리 지금의 제 사람들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살고 싶네요.
 

사진_픽셀


답변) 

왕따로 인한 고통은 하나하나 모두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합니다. 이런 왕따의 광범위한 악영향 중에서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부분은 사람과 환경에 따라 다르죠. 왕따의 악영향 중 하나는, 가족 이외의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연습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 이후에,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 즉 부모와 가족을 대상으로 관계를 맺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 무언가를 줄 수 있는 방법,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 가까워지는 방법, 멀어지는 방법, 헤어지는 방법, 다시 가까워지는 방법을 어린 시절 가족 안에서 연습을 하게 되죠. 가족들은 나에게 호감이 있으니, 이런 연습을 하기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없는 경우 보다, 형제가 있는 경우에 친구관계가 더 수월한 거죠. 부모 자식 사이가 아니라, 거의 동등한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법을 연습할 기회가 많으니까요.
이렇게 가족들에게서 갈고닦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왕따라는 폭력적이고, 의미 있는 관계가 차단되는 상황에서는 이 능력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연습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왕따를 당했던 학교에서 아주 먼 곳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다시 왕따를 당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소문이 따라가기 때문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왕따 경험이 친구에게 접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리기 때문인 것도 있습니다.  

강아지에게 물렸던 사람은 처음 보는 강아지를 경계하겠죠. 마찬가지로, 왕따를 당하게 되면 사람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혹은, 정반대로 경계를 완전히 풀어버리기도 하죠.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공포로 뛰어드는 것처럼요. 이런 식으로 왕따를 당하는 동안 망가진 관계를 맺는 능력을, 다시 회복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가기 때문에, 새로운 친구들에게 이상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거나 관계 자체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 분이 대학교에 가서 겪으신 일이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에 대한 숙련도와, 그 방법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셨을 가능성이 높죠. 이런 부분은 사실 학창 시절에 이미 경험하고 극복하게 되는 문제이지만, 왕따로 인해 이런 경험 자체를 못하셨을 테니까요. 현재 아르바이트를 통해 만난 사람과는 잘 지낸다고 하셨으니, 그래도 다행입니다. 아르바이트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좀 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신 것으로 보이네요. 

나중에 취업한 뒤 직장에서 인간관계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신다고 하셨죠. 저도 이 부분이 걱정입니다. 다시 왕따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사실 왕따의 악영향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왕따를 당한 이유, 본인의 대처 방법, 부모님 등 보호자나 주요 관계 인물의 반응, 이 세 가지 주제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정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 티가 나게 지저분한 옷을 입고 다니거나, 지나치게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등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왕따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정말 다양한 원인 때문에 왕따가 발생하고, 심지어 이유 없이 왕따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따가 오랜 기간 지속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바로 본인이 왕따에 대해 스스로 은폐하거나, 부모님 등 주요 인물이 왕따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대응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질문자 분이 왕따의 이유나, 본인의 대처방법, 주요 인물의 반응에 대해 모두 밝히지 않으셨네요. 물론 상담을 받으러 오시는 분들도, 자신이 말하기 불편한 주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물어보기 전까지는 얘기를 안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얘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요.

질문자 분도 이런 경우와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따라서 애초에 가정이나 부모님과의 관계에 뭔가 문제가 있었고, 그 이후에 왕따가 발생했으며, 적절히 조언해 줄 사람이 없어서 문제가 심각하게 오래 지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만약 가정이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크게 문제가 없으시다면, 왕따 때문에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은 서서히 회복이 되실 거예요.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수밖에 없으실 거고, 그중에 좋은 사람은 반드시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가정이나 부모님과의 관계가 애초에 문제가 있으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거라면,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 분의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의 의미가, '다른 사람은 나를 왕따 시키고 괴롭혀서 믿기 힘들어.'인 경우와 '심지어 부모도 왕따를 당하고 있는 나를 보호해 주지 않았어, 그러면 다른 사람은 더 할 거야.'인 경우는 다릅니다. 전자는 '깊은 관계가 되면 나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후자는 '깊은 관계가 돼도 마찬가지로 나를 괴롭힐 거야.'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관계 자체를 무의미하고 공허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지금 본인이 다른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만족스러우시다면, 괜찮습니다. 본인의 삶에 만족을 하는데, 이게 어찌 이상한 상태일까요. 단지, 살아가시다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고생을 하신다면, 깊은 관계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면, 한 번쯤은 전문의의 상담을 받아보시는 게 도움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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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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