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은 힘든 이야기를 많이 듣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친구 관계에서 고민 상담을 많이 해주는 편인데, 하고 나면 감정적으로 힘든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은 힘든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면 지치지 않으시나요? 항우울제 같은 걸 꾸준히 드시나요?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은 따로 치료를 받거나, 힘들 때 해결하는 방법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과 의사로 일을 하면서, 많이 들었던 질문 중에 하나인 거 같습니다. 우선 정신과 의사들이 힘든 이야기를 많이 듣는 직업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우울제 같은 약을 꾸준히 먹거나 그로 인한 치료를 받지는 않습니다. 대신 정신과 전문의를 취득하기 위한 수련 과정에서 말씀해주신 부분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습득하게 됩니다. 상담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신과 전문의를 취득하기 위한 필수과정인 'psychotherapy'라는 상담 치료에 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들으시면 의아해하실 수도 있지만, 상담 과정에서 치료자는 최대한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제로'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대인관계를 보면, 대인관계 속에서 많은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감정의 일부는 상대방의 몫이고, 일부는 내 몫으로 혼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 몫'을 최대한 배제하고 '상대방의 몫'만 상담과정에 다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다'라고 rough하게 이해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대인관계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에는 '화'로 대응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로 '화'를 내는 상황이 되겠지요. 감정의 얽힘이 있고, '내 몫'과 '상대방의 몫'이 혼재되게 됩니다. 이 경우에 원래 '화'가 많은 사람은 그 화의 원인을 상대방으로 돌립니다. 네가 '화'를 내니까 내가 '화'를 내는 거라고요.

하지만 상담 과정에서는 치료자가 최대한 백지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원래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은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화'의 이유를 상대방에게서 찾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왜? 내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일반적인 심리이죠. 그런데 치료자의 몫으로 돌리려고 해도 그럴만한 근거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내담자는 결국 '아 그냥 내가 화가 많은 사람이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치료 과정에서 '화'라는 감정이 나왔고, 여기서 치료자의 몫이 조금이라도 생기게 되면 내담자는 그것을 원인으로 찾게 되고 본인의 원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치료자가 백지상태가 될수록 내담자가 본인의 모습을 보기가 수월해집니다.

이것은 치료자에게도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상담과정에서 '화'라는 감정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 감정에 치료자의 몫이 있다고 인지가 되면, 치료자도 사람인지라 거기에 방어적으로 나오게 되고, 거기에 따라 본인의 감정도 커지게 됩니다. 그러면 글쓴이 분께서 궁금해하셨듯이 치료자도 무척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치료자가 자신의 몫을 잘 다루어서 최대한 '백지상태'에 가깝게 positioning을 하면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고, 최대한 '내담자'의 감정만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이럴 경우, 감정의 얽힘이 있는 일반적인 대인관계의 경우보다 훨씬 힘듦의 정도는 덜 합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백지상태'에 가깝게 있을수록 좋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건 가장 이상적인 경우이고요. 현실에서 정신과 의사는 최대한 그렇게 되게 노력을 합니다. 글에서 '치료자의 몫'이라고 표현했던 부분은 전문 용어로 '역전이'라고 합니다. '역전이'를 잘 다루는 것이 치료자로서의 능력이라고 이해해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역전이'를 잘 다룰수록 치료자가 감정의 얽힘 안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그로 인해 영향받는 것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이 때문에 정신과 의사도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은 절대로 치료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는 너무나 복잡한 감정의 얽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의사의 정신건강에도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를 하면, 정신과 의사도 사람인지라 그 안에서 힘듦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그 마음을 스스로 다룰 수 있도록 수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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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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