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학업문제로 늘 심리적으로 압박감이 듭니다. 제 성적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만 주변에서 제 성적 가지고 참견하는 것이 정말 혐오감이 듭니다.

저희 아버지는 서울대 출신이고 그런데도 우리 집은 가난합니다. 그런 탓인지 어머니께서는 제 성적표만 보면 제가 나중에 벌어올 돈 얘기밖에 안 합니다. 어찌 보면 제 장래를 이미 다 결정하신 거 같습니다. 아버지까지 서울대 가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씀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차라리 죽어서 다른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 내신이 전교 1등 수준도 아니고. 돈 든다고 재수도 안 된다고 하면. 딱 1번의 수능으로 서울대 들어가라는 건데, 제가 서울대 들어간다고 누가 보장해주지도 않았건만,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쓸데없는 고민밖에 안 들고 만약 제가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면 한 몸에 받을 가족의 실망만이 반복적으로 떠오릅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봤자 그런 결말이라면 무에 소용 있겠나 싶고 그럴 때마다 허탈감이 몰려듭니다. 게다가 저는 승부욕까지 강해 남에게 성적을 추월당하면 그때야말로 딱 자살하고 싶더군요. 정말 피곤한 성격이 아닌가요. 공부를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갈까 싶어도 그놈의 대학교가 발목을 잡아요.

기분전환을 하자 싶어서 밥 먹으면서 TV라도 보고 있으면 처음엔 재밌다가 나중에는 또 강한 허탈감과 우울감이 들고 전혀 즐겁지 않아요. 부모님 기대를 만족시키려면 이런 거 볼 때가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하는데 뭐부터 해야 할까, 너무 복잡하고 힘들고 지쳐서 눈물이 나고요.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아마 모르지만 온갖 신경성 질병도 가득일 거 같아요.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아있어도 얼마나 우울한지, 시험지를 나중에 채점하려고 봤는데 그 페이지에 눈물 자국이 보이면 더 우울할 뿐이에요. 옆에 누가 있어도 허탈, 공허, 외로움만 느껴지고. 옆에 누가 없으면 더 심해집니다. 거울에 비친 저 자신을 보고 격려하고 있어도, 희망이 없어 보여요. 그래서 더 미치겠어요.

감정 기복이 날로 갈수록 심해져요. 극단적인 생각까지 가끔 하게 됩니다. 저 어떡하나요, 절 좀 도와주세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글에서 질문자님의 깊은 고민이 묻어나는 것 같아 저도 마음이 참 안타깝네요. 먼저 힘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일단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해요. 문제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시면 좋겠습니다. 질문자님이 고민하는 것은 성적이 떨어져 부모님에게 비난받고,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두려움인 것 같네요. 하지만 우리는 그 전제부터 다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서울대를 가는 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부모님의 뜻을 은연중에 ‘내가 원하는 것’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마 질문자님의 경우 후자 쪽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소아-청소년 시기에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외연이 굉장히 좁아요. 자신의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경우도 많아요. 은연중에 부모님이나 주변 친구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자신이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 부모님의 뜻이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생각, 정서, 행동을 아이들은 그대로 따르고 흉내 내게 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리지도 않아요. 질문자님이 공부뿐만 아니라 삶 전체를 대하는 방식이 부모님과 많이 닮아 있는 건 아닐까요? 부모님의 불만스러운 점까지도요.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걸까요? 부모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겁니다. 성적과 돈, 이 두 가지만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생각을 부모님의 부모님에게 물려받았을 테지요. 만약 부모님께서 자신의 자녀에게 더 이상 이런 경직된 가치관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다행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참 안타깝지만,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런 사고방식의 대물림이 이어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건강한 삶이란 그 반대가 되어야 하겠지요. 문제의 근원을 살펴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를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자신의 근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요. 

또, 성적을 잘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다면, 설령 원하는 모든 목표가 이루어진다고 한들 행복할까요? 아마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게 될 것이고, 남들과의 경쟁에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는 과정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지금은 성적이 좋지 않은 것 때문에 부모님에게 나쁜 평가를 받고, 눈치를 받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선택의 문제로 보면 좋겠습니다. 갈래길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가지 길은 ‘살던 대로 사는’ 길입니다. 그저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 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부유하게 사는 거지요. 이 길은 변화의 노력이 필요 없으니 편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고통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지속되겠지요.

또 한 가지 길은, 삶에서 조금씩 변화를 일구어나가는 길입니다. 꽤나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아요. 다만, 항상 자신이 행동을 선택할 때 자신이 평소 해왔던 방식과는 다른, 더 건강한 방법을 선택하는 겁니다. 공부는 확실치도 않은 먼 미래를 무언가를 얻기 위해 참고 견디는 과정입니다.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과도한 치우침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게 만들어요. 실은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여유로운 시각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 학교에서의 즐거운 순간들에 집중하셨으면 좋겠어요. 자신에 대한 비하가 습관이 되어 있다면 칭찬일기를 매일 꾸준히 써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파랑새는 의외로 가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성적 문제는 인생이라는 넓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에서 극히 작은 영역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측면을 가집니다. 성적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성적의 변화에 따라 더 큰 감정의 휘둘림이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성적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드는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질문자님께서 부모님의 영향을 굉장히 크게 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건강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 이 순간의 ‘소확행’에 집중하고, 조금씩 더 건강한 선택을 하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지금 학교 생활이나 학업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로 마음이 괴롭다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여 더 정확한 평가와 필요한 도움을 받으셨으면 합니다. 우울증의 정도가 심한 상태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 깊은 늪에 빠져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고통을 혼자서 정리하고 극복해나가기는 현재 상황에선 상당히 힘든 일일 수도 있고요.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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