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중반의 여성입니다. 지금은 대학 휴학 중이에요.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을 때리고, 정서적으로도 학대했었죠. 8살에는 여자라서 웃어야 한다고 거울 앞에 세워 놓고 웃으라고 강요받았고, 초등학생 때부터 1등이 아니면 세상에서 쓸모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늘 1등은 아니었지만 어딜 가나 모범적이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인생에는 등수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빠에 대한 분노로 속이 많이 곪아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들이나 엄마에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욕설, 폭언, 목을 조르거나 때리고 가래침을 뱉었습니다. 밖에선 좋은 아빠라는 소리 들으며 가족들 자랑을 하다가도, 집에서는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살림살이들을 다 부수고 던졌습니다. 술을 마셨던 아니던 간에요. 

엄마를 안방에서 가둬놓고 폭행할 때,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어서 너무 무기력했습니다. 그래서 9살 때부터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밤마다 아빠를 피해서 찜질방이나 친척집 등으로 피신하는 날들이 중학생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조현병 환자고, 조부모로부터 학대받으며 자랐다는 사실을 들으면서 연민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집을 나와 생활하고, 학교 선생님들이나 청소년 상담기관에 가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빠가 병이 있으니 네가 잘 해야 한다.’였습니다. 그래서 제 안에는 ‘조현병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해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나 제 가족들이 고생한 것에 대한 힘듦을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세상에 대한 분노만 쌓여갔습니다.
 

사진_픽셀


몇 년 전에 부모님이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일손이 모자라 몇 달간 같이 일을 하다가, 어머니를 위협하는 아버지를 제지하려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했습니다. 저는 그 길로 집을 나왔고 청소년 쉼터를 거쳐 현재는 여성 폭력 피해자 쉼터에서 경제적 자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라는 사람과 연을 이어가고 싶지 않고, 현재 상담소 선생님이나 정신과 치료를 해주시는 주치의 분도 물리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아버지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분리되기가 쉽지 않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제 진단명은 우울증과 외상후스트레스 증후군이고, 약물치료는 우울증과 조현병 치료에 쓰이는 약을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성에 대한 강한 거부감, 혐오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극복해 나가야 할 것 같고요. 최근에는 미래에 희망이 없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보건소의 자살예방상담도 같이 받고 있습니다.

사실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 선생님이나 여성폭력 쉼터 상담 선생님, 자살 예방 상담해주시는 선생님들에게 마음이 잘 열리지 않아서 솔직하게 모든 감정을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줄곧 직장에서 곧잘 잘리고 돈을 벌어오는 어머니를 구박하는 아버지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제 자신도 이렇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아버지와 닮은 것 같아 자괴감이 들고 실패한 인생 같습니다.

만나는 남성 애인이 있는데, 제가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애인에게 나 우울하다고 표현하는 게 폭력적인 것 같습니다. 애인은 그렇게 느끼지 말라고 저를 안심시키지만 그러다 우울한 저에게 지쳐서 저를 떠날까 봐 두렵습니다. 이런 제 모습이 아버지와 닮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 아버지와 제가 다른 점은 많이 찾을 수 있겠지만, 닮은 점을 찾게 되면 그 사실이 너무 괴롭고 힘이 듭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이런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변) 

아동 학대는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방임, 성적 학대, 이렇게 크게 4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대의 원인은 수천, 수만 가지입니다. 각각의 가정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까요. 물론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학대가 용납되는 것은 아니죠. 먼저 학대 자체가 질문자 분에게 미친 영향을 먼저 살펴볼게요. 

아버지, 남성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계시죠. 일반적인 상황에서 부모는 나를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존재예요. 누구나 태어나면서 그렇게 믿게 되죠. 일종의 본능처럼요. 그렇게 내가 신뢰를 하는 사람이, 나를 가장 위협하는 경우에 어린아이의 혼란은 엄청나죠. 내가 생존을 위해서 의지해야 하지만, 그 사람에게 의지할수록 생존이 위험해지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이니까요. 

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정신적으로 저항하지 못합니다. 지금 저에게 누군가가 나쁜 사람이라고 욕을 한다면, 저는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하고 그저 기분 나빠할 뿐이겠죠. 하지만 자기 자신이 누군지에 대한 고민, 즉 사춘기가 잘 마무리되기 전 아이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내가 누구인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죠. 쉽게 말해서 소용없고, 쓸모없다는 얘기를 들을수록, 무의식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그런 사람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비난을 하는 주체가 부모라면 그 영향은 더 강력할 수밖에 없죠. 어린 시절 부모는, 누구에게나 거대한 존재니까요.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겪은 분들은, 공통적으로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인간관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른 사람이 실제로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해도, 그 상황이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죠.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란 자신을 원래 힘들게 한다는 관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상황이 싫지만 정상이기도 한 거죠. 즉, 관점 자체가 왜곡되어 문제 상황을 파악하는 게 더 힘들어지죠. 그래서 폭력 상황에 오래 노출되셨던 분들은, 다시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병이  더 깊어지게 되죠.

마음의 병이 깊어지게 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정신병이 있었던 아버지가 형편없는 생활을 했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게 되거든요.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학대를 받았었고, 정신병이 있고, 조현병 약을 먹고 있고, 현재 생활이 어려운 것이요. 그리고 혈연관계라는 특수한 관계가 이런 공통점을 마치 아버지와 내가 비슷한 사람인 것처럼, 운명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버립니다. 피해자 스스로가 가해자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죠. 

천천히 생각을 해보면, 아버지와 질문자분은 차이점이 훨씬 많을 겁니다. 질문자 분은 사람을 때리지 않으시겠죠. 또 아버지와 달리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한 배려도 있으시죠. 그런데 어찌 아버지와 질문자 분이 닮은 사람일까요. 또, 이런 고민을 하시는 분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본인도 이 부분은 잘 아실 거예요. 그래서 아마 질문자 분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핵심은, 내가 증오했던 아버지의 부분들이 자기 자신에게도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폭력을 겪은 분들은 자신 마음 안에 생기는 폭력적인 감정에도 크게 놀라게 돼요.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폭력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분노, 짜증, 시기, 질투, 이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있죠. 그런데 폭력을 겪은 분들은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 스스로가 가해자, 질문자 분의 경우에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려워합니다. 워낙 강한 상처를 받았으니까요. 자신이 그런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죠. 

또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감정표현을, 혹은 어머니나 다른 가족의 감정표현을 버겁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가끔은 감당 못할 상대방의 감정에 분노하셨겠죠. 그러니 현재 본인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것이 폭력적이지 않을까 고민하시는 거죠. 또 애인이 질문자 분이 어린 시절 가족들의 감정을 받아낼 때 겪었던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까 고민하시는 걸 거고요. 

'내 마음속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아버지와 관련 있기보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느끼는 두려움이 줄이기 위해서 바로 이 깨달음이 필요한 거죠. 이런 부분을 주치의 선생님이 정신적으로 분리돼야 한다고 표현하신 것 같아요. 현재 정신 치료는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지금 주치의 선생님과 치료를 꾸준히 지속하시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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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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