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살고 있는 20대 후반 여자입니다. 최근 4년 만났던 남자 친구와 이별을 하고 견디기 어려워 심리 상담센터도 찾아가 봤지만 아직 초기라 진전은 없고, 자존감을 찾기 위해 글쓰기나 자기계발 등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기를 쓰고 헤어진 남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는 4년을 만났는데요, 동갑내기라 늘 다툼도 많고 헤어지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붙잡은 건 저였고, 헤어지자고 매번 말하는 것도 저였습니다. 남자 친구가 저에게 관심 없는 태도, 행동을 보일 때 견디기 어려웠고, 결국은 늘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늘 쉽게 내뱉었습니다. 전 헤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도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하는 그 한마디면 늘 충분했는데... 남자 친구는 언제부턴가 이런 반복되는 싸움에 저를 그냥 놓아 버리더라고요. 싸움조차 지겹다며 최근에는 그조차도 헤어지는 사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늘 버려지는 것이 두려웠는데, 나를 버리고도 남을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 그 뒤로 저도 열심히 몸부림치며 별거 아닌 거에도 예민하고 서로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둘 다 너무 다른 사람임을 알았고, 그럼에도 늘 붙잡았고, 다시 만나주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한쪽만 기우는 사랑이 힘들다는 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아 저는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날만큼 굳어온 성격이라 서로 맞추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요. 그런데 저는 예민하고 날이 서있는 성격인 반면 제 남자 친구는 언제나 무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남자 친구 성격을 언제나 저의 사랑에 빗대어 생각하여 '너는 왜 이러지 못해? 이게 사랑이야?'라고 그를 많이 질책하고 궁지로 몰았던 것 같습니다.
 

사진_픽셀


주변 사람 모두가 서로 맞는 사람을 찾으면 돼, 제가 또는 그 친구가 잘못을 한 건 없다며 잊으면 된다고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아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신 상담받으며 그동안 남자 친구를 가족보다 더 가까이 여겨 제 자신도 놀랄 정도로 쉽게 화내고 짜증내고 분노조절이 안 되는 것을 안정시키며 상담받고 있고요, 이제야 그 사람의 대해서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도 정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여가시간에도 영어공부를 한다든지 자존감 글쓰기 특강을 간다든지, 정말 다방면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도 없고 이렇게 기다린다고 해서 만나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힘든 시간을 이렇게 견디고 있는데요, 제가 뭘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A) 먼저 길고 자세하게 글을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짧으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몰라 답변하기 어렵고, 반대로 글이 길면 글을 읽고 궁금해지는 내용들이 많아 쉽게 답변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제 내공이 부족한 탓도 있겠죠. 

그래서 적어주신 글 내용 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가장 확실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합니다. 

바로 마음과 정반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음은 헤어지기 싫지만, 입으로는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사귀고 싶지 않은데, 사귀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방도 사귀고 싶지 않다면 다행이지만, 상대방이 사귀자고 한다면 그다음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헤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헤어지기 싫다면, 헤어지자고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상대방도 헤어지자고 한다면 그다음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지 않을까요.'

이렇게 대답을 가장 많이 하시곤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유명한 광고 카피처럼, 가까운 사이에서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로맨틱한 얘기긴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가까운 사이에서는 서로 물어보는 게 부담이 없으니 실제로 의사소통을 더 많이 합니다. 이 의사소통은 말뿐만이 아니라, 얼굴 표정이나 행동같이 서로 오랜 기간 사용했던, 약속된 신호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근거 없이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헤어지자는 말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상황은 아닙니다. 정해놓은 신호도 없겠죠. 그러니 헤어지자는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상대방의 마음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을 했던 상대가 다시 사귀자고 말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어떨까요?

남자 친구분은 헤어지자는 말에 무기력하게 됩니다. 질문자 분이 여러 번 말을 번복했기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을 헤어지자는 말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죠.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헤어지자는 말을 헤어지기 싫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사이가 안 좋은 상태에서 헤어지자는 얘기가 나왔을 테니까, 그 말을 반대로 해석할 수도 없죠. 헤어지자는 충격적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생깁니다.

이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철장에 쥐를 가두고, 전기 자극을 가합니다. 처음에는 쥐가 전기를 피할 곳을 찾아서 뛰어다니죠. 하지만 실험이 반복되고 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쥐는 그 자리에서 그냥 전기 자극을 받습니다. 피하려 하지도 않죠. 철장 안에 전기가 흐르지 않는 물체를 넣어줘도, 쥐는 그냥 전기 자극을 받고 있죠.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 거죠. 

남자 친구분도, 자신이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충분히 무기력감을 느꼈을 거고, 질문자 분은 그 무기력감을 '그냥 놓아버린다.'라고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연인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헤어지는 것'에 관한 것에 대해 무기력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연인 관계는 '한쪽으로 기우는 사랑'이 되었겠죠. 남자 친구분이 연애의 모든 부분에 무기력감을 느끼셨을 테니까요. 한 번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남자 친구분이 애초에 질문자 분을 버릴 사람이었을 가능성보다는, 질문자 분의 행동, 특히 헤어짐에 대한 언급과 번복이 남자 친구분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사실 헤어지자고 말한 뒤 질문자 분은, 남자 친구가 그 관계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를 원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가 정반대가 되었죠. 남자 친구분은 관계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으니까요.
 

사진_픽사베이


길게 설명했지만, 바로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밀어낸 말과 행동이, 실제로 상대방을 밀어냈고, 상대방이 밀린 것을 질문자 분이 '나를 버리고 남을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밀어낸 사람은 질문자 분인데도요. 밀어서 밀렸는데, 네가 스스로 뒷걸음질을 친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즉, 처음부터 상대방을 '나를 버릴 사람'으로 가정하셨다는 거죠. 

동시에 이런 가정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거기도 합니다. 나를 버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깐, 상대방이 나를 정말 버릴지, 어떤 상황에서 버릴지가 궁금해지겠죠. 

그러면, 질문자 분은 왜 가족보다 가까운 연인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가정했는지 얘기를 풀어가야겠죠. 이 이후의 얘기는 지금 적어주신 글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적어주신 대로, 자존감이 낮아서, 즉 내 존재가 너무 별로이기 때문에 상대방도 그것을 곧 알아차리고 떠날 거라고 생각하신 걸 수도 있겠죠. 또는 과거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반복적인 경험이, 다른 사람은 결국 나를 버리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별의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부분은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남자 친구를 이해를 하지 못하고, 소유물처럼 다뤘다고 말하는 부분도, 이별의 원인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있다고 인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 안의 어떤 부분이 이런 이별을, 이런 관계를 반복하게 만드는지는 상담을 통해서 꼭 확인하셔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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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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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도움됩니다. 조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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