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제 여자 친구는 분명 어딘가 문제가 있습니다.

제 스스로 여자 친구가 가지고 있을만한 여러 병들을 생각하고 있지만 제가 의사가 아니니 각설하고, 제 여자 친구는 몇 가지 별로 달갑지 않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감시, 감청을 한다는 생각

누군가 여자 친구를 감시하고 감청한다고 합니다.

제가 IT 보안 쪽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제가 봐도 말도 안 되거나 가능하지 않은 방법, 혹은 제가 모르는 방법으로 자기는 해킹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전자기기를 불신합니다.

핸드폰은 관계 중에는 치워놓아야 하고 출근할 때도 핸드폰은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들켜도 상관없는 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만 핸드폰을 휴대합니다.(pc 포함)

 

2. 제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말을 해놓고 기억을 못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다른 사람과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가족, 친구 옛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되짚어 봐도 저는 오히려 상대가 했던 말을 더 잘 기억했으면 잘 기억했지 잊어버리는 스타일이 아닌데 항상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하고 기억 못 하면 그걸로 화를 냅니다.

 

3. 모든 사람이 자기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

위에 1번에서 조금 파생된 생각인데요. 제 여자 친구는 나이가 벌써 30대 중반인데 6개월 이상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감청하는 세력이 자기가 회사만 가면 손을 뻗쳐서 자기에 대해 말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그 내용은 자기 집안 내용, 데이트했던 내용 등 자기는 분명 말한 적이 없는데 모두 알고 있더라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이런 말을 한 뒤 1~2주 안에 대부분 그만둡니다.

 

사진_픽사베이

 

세세한 것들도 많은데 너무 많아 크게 추렸는데요.

처음에는 진짜 있다고 믿고 싶어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라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녹음이라도 해오라고요.

근데 될 턱이 있나요. 자기도 녹음하고 싶다는데 들어보면 바람소리만 나옵니다. 들리지도 않고요.

그러다 보니 점점 이제는 병이라고 확신이 들어서 위 내용이 말만 나오면 병원부터 가보자고 논리적으로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안 듣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서 병이 아닌 것이 확실하면 그다음에 감청이나 감시에 대해서 알아봐도 늦지 않느냐고 설득을 해보는 중인데 절대 아니랍니다.

자기도 처음에는 병이라고 생각했고 또 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근데 이제는 확신이 든다나요?

오히려 믿어주지 않는 제가 욕먹고 있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나요?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 도대체 무엇을 하면 치료를 받게 할 수 있나요? 

임상적 경험에서 느껴지는 자세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A)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을 거예요. 남자 친구분의 어려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합니다.

먼저 말씀해 주신 여자 친구분의 문제들을 정리해 볼게요.

 

여자 친구 분은 스스로가 감시, 감청당한다고 느끼고 있네요. 또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이 공유하고 있다고도 생각하고요.

여자 친구 분 스스로도 녹음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걸로 봐서는, 남들이 본인의 험담을 하는 것이 귀로 들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남자 친구분이 곁에서 보시기에는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일 테고요.

현재 직장을 다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30대 중반까지 6개월 이상 회사를 다니지 못했다는 것도 일반적이지는 않네요.

회사를 그만둔 이유가 본인을 감청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인 것은 더 일반적이지 않고요.

 

지금까지 말한 것을 토대로 몇 가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자 친구분의 문제는 양극성 정동장애, 정신증이 동반된 우울증, 조현병, 혹은 심각한 PTSD나 일부 인격 장애, 기타 의학적 문제에서 나타나곤 합니다.

 

먼저 양극성 정동장애는 주로 10대에 발병합니다. 증상이 심할 때는 망상과 환청이 들리기도 하죠.

보통 몇 개월 정도는 증상이 있다가, 그다음 몇 개월은 정상처럼 보이고, 다시 몇 개월 동안은 증상이 생기는 모습을 반복합니다.

정상처럼 보일 때 취직이 되고, 증상이 생겼을 때 실직하는 양상을 반복하기 때문에, 취직은 되지만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상일 때는 애인과 친구를 사귈 수 있으나, 증상이 생겼을 때는 그 관계에 악영향을 줘 인간관계 역시 빈약하게 됩니다.

 

사진_픽사베이

 

두 번째로, 조현병은 여자의 경우 주로 20-30대에 발병하고, 망상과 환청으로 인해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보통 증상이 한 번 발병하면,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계속 악화되죠.

이 글을 쓰신 남자 친구분이 여자 친구를 몇 년 동안 만나셨다면 망상과 환청이 서서히 악화되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또 조현병 증상이 있는 상태에서 회사에 취직이 되는 일은 드뭅니다. 단순 노동이 아닌 이상 면접관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거든요.

마찬가지로 발병을 한 이후에는 치료받지 않았다면, 애인과 친구를 사귀는 것도 힘들죠. 

 

세 번째로, 정신증이 동반된 우울증은 양극성 정동장애와 비슷한 패턴을 보입니다. 하지만 양극성 정동장애처럼 기분이 들뜨거나 예민하지 않고, 우울하다는 차이가 있죠. 

네 번째로 과거에 반복적으로, 감시받고 사생활이 노출되었던 경험이 있는 심각한 PTSD나 일부 인격 장애의 가능성도 있으나, 이 경우는 오래전부터 발생했기 때문에 남자 친구분과 사귀는 시점에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셨을 겁니다. 관계를 오래 지속하는 것도 쉽지 않죠. 

마지막으로, 기타 의학적 문제로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 같은 신체 질환이나, 일부 다이어트 약의 과량 복용, 기타 약물중독의 경우도 말씀하신 증상이 나올 수 있고, 검토가 필요한 상황 같습니다. 

 

당연히 여자 친구 분을 직접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성만 얘기할 수 있을 뿐, 진단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야 할 상황임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을 남자 친구분도 아시기 때문에, 병원을 권유하셨던 것 같습니다.

'넌 지금 망상이나 환청이 있는 것 같고, 그건 정상이 아니니깐 정신과에 가보자!'라고 망상이나 환청이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 친구 분에게는 남이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나, 감시당하는 느낌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죠. 하지만 여자 친구 분에게는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문제를 망상과 환청이라고 정의하는 겁니다. 

지금 남자 친구 분께, '사실 당신 여자 친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외국에서 온 스파이가 당신 여자 친구인 척한 겁니다.'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당연히 아니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증거를 말씀하시겠죠. 여자 친구 분의 반응이 좀 이해되시나요?

그래서 방향을 조금 바꿔서 설득하는 게 필요해요. 

'네가 지금 직장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런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느냐, 스트레스 상담을 좀 받아보자.'

이렇게요.

여자 친구분도 그런 상황이 분명히 힘드시겠죠. 자신을 감시하는 저항할 수 없는 세력과 싸우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부분을 상담받아보자고 하면, 수긍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담을 받겠다고 하면 기타 의학적인 이유의 가능성 때문에, 되도록이면 혈액검사가 가능한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자 친구 분의 문제가 더 심해진다면, 여자 친구분의 가족과 접촉하시는 것도 생각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여자 친구 분은 지금 가상의 세력과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언젠가는 지치고, 자포자기하는 시점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죠.

만약 이런 극단적인 행동에 대한 말을 한다면, 가족 분들에게 반드시 알리셔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나중에 여자 친구와의 관계가 안 좋아질 수도 있죠. 하지만 여자 친구가 자신을 해치거나 남을 해친다면, 남자 친구분과의 관계는 더 안 좋아지겠죠. 또 두 분 모두 큰 상처를 받게 될 거고요. 

우리는 연애를 시작할 뿐, 어떻게 흘러갈지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연애의 끝도 알지 못하죠.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와 버린 애인 관계지만, 이 조언을 바탕으로 잘 극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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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도움됩니다. 조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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