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초반 직장인입니다.

항상 밝고 아무 일 없이 지내는 듯이 보이는 분들도 각자 힘든 일을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글을 쓰는 저에게도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요즘 들어 제 주변에는 힘든 상황에 계신 (혹은 그런 고민을 이야기하는) 지인들이 많아졌습니다. 단순히 회사 때문이기도 하고 각자가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 등등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도움이 되고 싶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떻게 해야 이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진짜 공감을 하고 위로를 해드릴 수 있을지 어려웠습니다.

막막한 상황에 처한 친구가 이야기를 할 때에 저도 정말 막막하고 답답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힘든 상황에 계신 분들과 대화할 때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A) 안녕하세요. 주변의 고민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으시군요.

질문자님 본인에게도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변의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분명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시고 마음속에 따뜻한 사랑이 많으신 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는 질문자님께서 그렇게 힘든 상황에 계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만으로도, 질문자님 주변의 고민하고 계신 많은 분들께서는 충분히 많은 위안을 얻어가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자님께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주변 분들의 어려움에 귀 기울여 주시는 그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치유적이고 따뜻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사람의 마음을 보듬는 것은 어떤 기술적인 말이나 조언 같은 것보다는 그 사람과의 '관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사진_픽셀

 

한 예로 제 선배이신 어떤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병원에 수십 년간 만성 조현병을 앓고 계신 환자분이 한분 입원하셨었습니다.

슬프게도 만성화된 중증 조현병은 사실상 완치가 어렵습니다. 병을 조절해 나가는 수준의 치료가 현실적인 한계인 병입니다.

망상과 환청이 약으로 완전히 조절되지 않기도 할뿐더러 사회적인 능력이나 기능 수준이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많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는 현대 의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여간 그때 입원하신 환자분도 그런 만성 조현병으로 병원에 이미 수십 년간 입퇴원을 반복하며 지내오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가장 심각한 증상 중의 하나는 두 발로 바닥에 서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리에 문제가 있거나 신경학적으로 어떤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께서는 '내가 두 다리로 서서 걸으면 세상이 멸망할 것이다'라는 이해하기 힘든 망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침대에 누워서만 생활한 지가 이미 한참 된 상황이었습니다.

 

망상이란 증상 자체가 원래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는 사회적 통념에 어긋난 '믿음'이기 때문에 어떻게 설득할 수가 없었지요.

그분이 두 다리로 서는 것과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는 그 환자분께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환자분이 저희 병원에 처음 입원을 하게 되면서, 앞서 말씀드린 제 선배분께서 주치의를 맡게 되었었습니다.

 

당시 환자분께서는 걷지를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씻거나 식사하거나 운동하는 등의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도 어려웠었습니다.

사실상 입원을 장기간 유지하면서 그 환자분께서 영양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의 의학적 보조를 제공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지요.

그동안 그 환자분을 보았던 다른 많은 선생님들도 아마 그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게 많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의사로서는 절망적이고 답답한 환자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때 그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환자분에게 조금 특별한 의사였습니다.

그 선생님께서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그 환자분의 발을 직접 씻겨 주시고, 식사를 직접 떠먹여 주셨거든요.

보통 의사들은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모여 병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그때 그 선생님께서는 그러지 않고, 환자분 침대에 앉아 환자분과 함께 식사를 하며 먹여주셨습니다.

침대를 벗어나지 못해 씻지 못하는 환자분을 직접 화장실로 데려가 씻겨 주셨습니다.

 

사실 정말 드문 광경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정신과 의사가 직접 환자분에게 그렇게 온몸으로 헌신하는 일은 보기 힘들거든요.

그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매일 같이 환자분을 씻겨주고 식사를 함께 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대화를 이어가기를 몇 주간 지속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 같지만 정말 기적적으로 그 환자분은 일어서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치의 선생님께서 환자분에게 말씀해주셨거든요. "일어서도 괜찮을 거예요."라고 말이죠.

 

어떠신가요? 지어낸 이야기처럼 들리실지 모르지만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그 환자분께서 대체 어떻게 걸을 수 있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뛰어난 언변으로 환자분을 설득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환자분이 깨닫지 못했던 어떤 숨겨진 의표를 찌르며 망상을 깨뜨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 환자분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을 그 단순한 이야기 '일어서도 괜찮을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라는 말에 그분은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사진_픽사베이

 

저는 그것은 그 주치의 선생님께서 그 환자에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누구도 그 환자 분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던 것이죠.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그 선생님만큼은 그 조현병 환자분에게 '이 선생님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믿어도 될 것 같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환자분도 '이 선생님이 이야기하니까' 걸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설사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공포가 든다 하더라도 말이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정말 도움을 받고 치료받는 것, 힘겨운 세상을 이겨낼 위로와 힘을 얻는 것, 역경을 디뎌낼 내 안의 길을 발견해 내는 것이 어떤 번득이는 아이디어나 촌철살인에 담겨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녕 움직이는 것은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 너와 나 사이의 관계 안에 모든 것을 바꿀 강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누가 그 말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처럼 말이지요.

 

물론 저 같은 정신과 의사나 심리상담사로서 상담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상담의 기술을 배워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신 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또 그분들에게 맞는 섬세한 조언과 위로를 드리기 위해서라도 기술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그 어떤 기술보다도 '내가 환자분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느냐', '어떤 사람으로 이 사람 앞에 마주 앉아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근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질문자님께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이 듭니다.

질문자님께서 주변 분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듣고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진정성 있게 공감하고 위로해주고자 하신다면 그것이 주변분들과의 관계로 이어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해결하기 어려운 심각한 마음의 고통을 겪고 계신 분이라면 좀 더 전문적인 정신과 전문의에게 찾아가 보길 조심스럽게 권유해 보시는 것도 필요하겠지만요.

사람과 마음에 관심이 많으신 질문자님의 따뜻함을 응원하겠습니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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