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무슨 이유에선지 태도가 변했고, 삐진 것처럼 말도 잘 하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소원해졌고, 관계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죠.

언젠가 만나서 서로의 오해를 말해 보려고 했었는데도 잘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같은 동네에 살고,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분명 상대방이 저를 알아봤을 거리인데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면 몸을 옆으로 돌려 스마트폰을 보는 시늉을 하거나,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는 언젠가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인사하려 했었는데, 상대가 저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몹시 나빠집니다.

서로 싸운 것도 아니고 일방적인 오해든 뭐든 간에 저를 그렇게 피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해지네요.

가끔은 상대한테 전화해서 꼬치꼬치 따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럴 땐 저도 그냥 같이 무시하는 게 답일까요?

 

사진_픽셀

 

A) 적어주신 정황을 볼 때, 분명 일반적인 시각에선 상대방의 행동이 질문자님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충분히 기분 나쁘실 수 있는 상황일 테지요.

다만, 이런 정황에서 느끼게 되는 불쾌감에 대해 한 번 들여다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그저 담백하게 ‘나를 피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면, 기분이 나쁠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불쾌감은 부정적 감정 중 분노의 범주에 해당됩니다.

분노나 화는 부당한 상황이나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주로 느끼게 되는 감정이지요.

질문자님께서 상대의 행동을 보며 은연중에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요?

 

상대의 행동을 바라보는 상황과 분노의 감정 사이에는 우리가 채 알아차리지 못한 단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상황을 해석하는 단계입니다.

질문자님께서는 상대의 행동 때문에 불쾌하다 느끼시지만, 기실 상대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해석으로 인해 감정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같은 상황에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상황과 감정 반응 사이에 숨어있는 ‘나를 무시하는구나’라는 짧게 스쳐 지나간, 그래서 알아채기 힘든 생각들을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라 합니다.

말 그대로 자동적으로, 조건 반사처럼 지나간 생각이지요.

아래의 그림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니 나를 피해 다닌다’는 자동적 사고는 정답일까요?

인간은 은연중에 상대의 표정, 행동거지를 보고 상대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는 오류에 쉽게 빠지곤 합니다.

인지치료의 창시자인 Aaron T. Beck은 이를 인지오류(인지왜곡)라 칭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오답이란 말이죠.

그중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오류가 ‘독심술(mind reading)의 오류’입니다.

우리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오만이 인간관계에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또 감정적으로 격앙될수록 독심술은 더욱 기능을 부립니다.

질문자님은 현재 독심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상황을 한번 가정해 봅시다.

멀리서 마주친 상대가 또 나를 슬쩍 피합니다.

질문자님께선 이전처럼 불쾌감이 느껴지고, 쫓아가 마구 따지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그런데, 질문자님과 상대방 둘 다 잘 아는 친구가 이 광경을 보더니 슬쩍 귀띔을 해줍니다.

상대방이 질문자님께 저지른 큰 실수 때문에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 부끄러워 인사도 못 하고 지나가게 됐다고, 언젠가는 사과를 꼭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네요.

어라,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닌데, 상황에 대한 해석은 분명 바뀌었을 겁니다.

그리고 분노와 불쾌감은 분명 사라지겠죠.

 

상대를 이해하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상대의 행동에서 과도한 독심술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상대의 가치중립적인 행동에 필요 이상으로 의미의 꼬리표를 달아댄 것은 아닌지도요.

 

그래요, 무시하는 것이 답은 맞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마음속에 못내 찜찜함과 불쾌감을 남겨 놓는 것과, 중립적인 상황에서 여러 의미를 부여해 스스로 분노를 만들어내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반응을 잘 조절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겠죠.

 

또 한 가지, 혹시 주변에 현명하다 여기는, 그래서 본받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세요.

같은 상황을 놓고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면, 이 또한 자신의 마음 바탕을 잘 들여다보고 건강한 시각을 배울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요.

부디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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