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후반 남성이고 직장인입니다. 현 직장에서 햇수로 4년 정도 근무했고, 급여는 많지 않지만 나름 안정적으로 꾸준히 다닐 수 있는 직장입니다. 제 흥미와 적성에도 잘 맞고 경력 개발 경로 또한 어느 정도는 마련되어 있어 만족하고 있습니다.

직장 내에서 상사 및 선후배와의 관계도 원만하고, 업무 수행 능력 또한 인정받고 있습니다.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고, 만족하며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적·사회적 문제가 크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안하다는 겁니다.

불안으로 인해 파괴적인 미래를 예견하게 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현재의 나를 더욱 몰아붙인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몰아붙이다 못해 한계에 봉착하면, 항상 알코올을 남용하고, 의존하며 스트레스를 풉니다. 

취하다 보면 과거 심한 알코올중독과 편집증, 가정 폭력을 일삼은 아버지와 제가 겹쳐지게 되고, 무력감과 수치심에(편집증적이고, 폭력적이진 않으나 알코올을 남용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 블랙아웃이 올 때까지 술을 들이붓고 잠이 듭니다. 

스무 살 무렵 가족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참 쉽게 떨쳐지지 않는 나쁜 기억인 것 같습니다. 저는 환경적, 기질적으로 불안이 높은 것 같습니다. 완벽주의 성향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이런 제게 있어서 특히 문제가 되는 점은, 제가 학부와 석사에서 전공했고 또 현재 수행하고 있는 직업이 모두 타인을 돕거나 교육 또는 지도하는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괴리감이 큽니다. 항상 머릿속에 ‘나 하나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놈이 무슨 자격으로 남을 돕고 치료할 수 있겠느냐고. 알코올중독이든, 네 마음속에 있는 불안이든 먼저 해결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제 삶을 되돌아보니 3년 동안 취하지 않은 날보다 취한 날이 더 많았더군요. 그렇게 변해야겠다고 다짐하고 하루, 이틀 술을 먹지 않으니 불면증 증상이 시작됐습니다. 그러고는 또 며칠 못 가서 술을 먹고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듭니다. 불면증을 해결한다는 명목하에 음주 행위를 정당화하며 강화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 패턴이 지속될까 봐 두려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약물치료도 상담치료도 모두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제 스스로 이겨 내고 싶습니다, 일단은요. 항상 닥터스메일과 정신의학신문 콘텐츠를 읽으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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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반갑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올려주신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나 불만족 없이 나름 만족하는 삶을 살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항상 불안감에 시달리신다고 하니 심적으로 많이 힘드실 것 같습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불안감으로 인해 사연자님의 미래를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예견하면서 스스로를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몰아세우고, 그로 인한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알코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의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이자 위험에 대비하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긴장감과 각성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이점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이고 정상적인 불안과 달리, 불안이 만연하고 과도해서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칠 때 우리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집중해서 높은 불안 수준을 낮추도록 힘써야 합니다. 때로는 전문가의 면담하에 ‘불안장애’로 진단되어 전문적인 치료를 요하기도 하죠.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대개 걱정이 지나치고, 고민이 많으며, 짜증이 잦고, 집중이 어려운 특징을 보입니다. 또 불면 증상이나 어지러움, 땀을 많이 흘리는 등 신체적 증상이 동반되기도 하지요. 불안장애의 원인은 개인마다 다양하고 복합적일 수 있으나, 보통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 모두 불안장애가 발달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뇌의 감정 중추의 균형이 흐트러진 결과, 즉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지면서 발생되기도 하죠. 불안 성향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특정한 환경이나 경험의 영향을 받으며 불안의 수준이 변화하기도 합니다. 특히 위험한 상황이나 위협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에 반복해서 그 사건이 떠오르거나,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그와 유사한 상황에서 극도로 불안해지는 것처럼 트라우마(trauma)가 내면화된 불안의 발달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연자님을 직접 뵙지 않은 상황에서, 사연자님께서 ‘항상 불안하다’는 이유로 섣불리 불안장애라는 진단을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연자님의 일상에 만연한 불안, 이러한 불안으로 인해 파국적인 미래를 예견하고, 이것이 심리적 고통을 가져오며, 결국 극한의 내적 긴장감과 불편감을 견디기 힘들어 알코올에 의존하는 패턴이 악순환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사연자님의 깊고 오래된 ‘불안’의 원인과 그 의미에 대해서 잘 이해해 보는 작업은 굉장히 의미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술에 취하다 보면 블랙아웃(blackout)이 올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잠잠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러한 패턴이 3년이나 지속될 정도로 이미 알코올 사용에 대한 자제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들기 어려울 만큼 심리적·생리적 금단 증상이 뒤따른다는 점입니다. 

과거 아버지의 알코올중독 및 가족 폭력의 경험이 비록 사연자님께서 스무 살 무렵에는 현실에서 중단되었기에 모두 해결된 듯하고, 또 그로 인해 의식적으로는 ‘괜찮아진 것’으로 인식하였지만, 사연자님의 무의식 속에는 내면의 깊은 불안감을 비롯한 아직 미해결된 여러 가지 감정적 과제들이 잔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술에 취하면 아버지의 모습과 사연자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무력감과 수치심이 느껴진다는 것은, 과거 사연자님께서 작고 힘이 없던 어린아이였을 때 가정 폭력의 피해자로서 느꼈던 무력감이 재현되고,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버지의 음주 행동을 통해 심리적 미해결 과제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과 앞으로도 아버지처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연자님은 분명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고, 충분히 자신이 겪고 있는 심리적 어려움이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불안한 가정환경에서 여러 가지 역경을 겪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안정적인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일을 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해서 알코올에 의존하는 생활이 지속된다면 몸의 건강은 물론, 정신 건강까지 악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경감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알코올 문제에 대한 치료를 받으시기를 권장하는 바입니다.

알코올중독은 병식이 없는 대표적인 질환 중 하나입니다. 사연자님께서도 알코올 문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금주를 결심하셨지만, 알코올 의존에 따라 새롭게 생겨난 불면증이라는 문제로 인해 다시 알코올을 찾게 되는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알코올은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향정신성 물질로, 뇌에 작용하여 다양한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다량의 음주를 지속하면 우리 뇌는 향정신성 물질인 알코올이 몸 안에 있는 상태에 적응해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알코올은 일시적으로 불안이나 수면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잠을 잘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다시 술을 찾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더불어 알코올은 우리 신체에 규칙적이고 누적된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해 불안을 더욱 악화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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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좀 더 적극적으로 현재의 알코올 의존 문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사연자님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요구됩니다. 사연자님의 음주를 지속시키는 생각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좀 더 건전한 방식으로 대처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세요.

이를테면, 사연자님께서 현재 불안으로 인해 파괴적인 미래를 예견하게 되는 ‘파국화’ 혹은 ‘최악을 예상하기’라는 정보처리의 오류, 즉 인지적 왜곡을 보임으로써 불안이 더욱 강화되고, 이것이 알코올 사용으로 연결되는 측면에 대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미래가 예상될 때마다 이것이 현실적인 근거가 없는 왜곡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러한 왜곡된 명제를 반박하기 위한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근거들을 노트에 정리해 가며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규칙적인 운동은 불안이나 수면 문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므로, 가벼운 운동이라도 규칙적이고 지속적으로 해 나가시기를 권고드립니다. 더불어 불안감 수준을 낮추는 데는 마음챙김이나 명상, 요가와 같은 활동들이 각성 수준을 낮추고, 신경을 이완함으로써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불면증을 알코올에 의지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실제적인 노력 또한 병행하시기 바랍니다. 잠들기 전에 격렬한 운동이나 카페인이 포함된 음료, 전자 기기 사용은 되도록 피하고, 침실 밝기는 어둡게, 또 온도와 습도도 쾌적하게 유지해 주세요. 그래도 잠을 청한 뒤 30분이 지나도 잠이 들지 않는다면, ‘지루한’ 책이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어 보신다면 어떨까요. 

이러한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코올 의존 문제가 지속된다면 가능한 한 빨리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시어 전문가와의 상담과 본격적인 알코올 치료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심리치료를 통해 과거에 미해결된 심리적 문제나 불안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 봄으로써 도움을 받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사연자님은 아직 젊으시고, 지금의 알코올 문제와 심리적 어려움을 해결할 내적인 힘과 에너지가 내재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술에 의존하며 사연자님의 마음속에 미해결된 심리적 고통을 외면하지 마시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마음의 근육을 키워 가는 데 집중하며 에너지를 쏟을 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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