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현재 26세인 여성입니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온 상태예요. 사실상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부터 성인으로서 알아서 할 일을 찾고, 자기 앞가림하고 하는 게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잖아요.
그럼에도 상담이나 누군가에게 부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눈물부터 납니다. 계속 고민했을 때 그 이유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가 불안하고 두려워서 그런 것 같아요. 당연히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슬프고 울적하겠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상대적으로 과하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로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해 왔고, 어머니의 니즈나 요구를 따라가고, 그렇지 못했을 때 자주 혼나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나중에 뭘 하는 데 있어서도 어머니는 그 일에 관여도가 크지 않음에도 계속 눈치를 보게 되고, 먼저 허락을 구하고, 의견을 묻게 되더라고요. 작은 핀잔에도 금방 주눅이 들고, 나를 공격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땐 일도 안 하시고, 어머니랑 싸우며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술을 마시고 들어와 화를 낼 때마다 ‘참 무능한 어른이다.’라고 실망하곤 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서도 동생과 제가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눈치를 준다든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술주정을 부리며 울 땐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고, 마음이 참 힘들었습니다.
자기주장이 심하고 신경질적인 어머니와 나이에 맞지 않게 굴고 술주정 부리는 아버지를 도무지 100%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제 자신이 너무 답답했습니다. 물론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뒤섞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저에게는 그 대상이 부모님이라는 사실이 참 힘들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이혼 과정에서 외도를 하고, 그 과정 중에 나에게 했던 것들, 아버지가 저를 때린 것 등등 안 좋은 생각이 종종 울컥하며 떠오르지만, 동시에 어머니가 저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행동들이나, 아버지가 그럼에도 저와 제 동생을 키우겠다고 데려오신 것 등도 생각나니까요.
그리고 현재에 와서, 저는 조금 더 나이에 맞게 굴고 싶고, 어른이 되고 싶음과 동시에 불가능한 소망을 꿈꿉니다.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마냥 부모님과 함께하고만 싶어요.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혼자 남을 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요. 그러한 두려움으로 종종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죽고 싶다.’라는 생각도 했어요. 정말 철없고, 바보 같은 제 자신이 싫기도 하네요. 현재의 제 모습이 잘못된 게 맞겠죠? 홀로서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반갑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올려 주신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 이십 대 중반의 나이로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 가는 중이시군요. 이렇게 다 큰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부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나고, 또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를 생각하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먼 미래의 일임에도, 혼자 남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불안함과 두려움이 크신 듯합니다.
누구에게나 ‘부모’라는 존재는 나와 내 인생의 큰 버팀목인 마치 ‘산’처럼 내게 의지가 되고 또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분들이기에, 그분들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적으로 힘들고 깊은 슬픔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감에 상당히 사로잡혀 있다거나, 혼자 남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면, 무엇이 이토록 사연자님을 부모님의 존재와 부재에 집착하게 만드는지 사연자님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혹시 ‘허구의 독립(Pseudo Independence)’이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대상자, 어린 시절에는 대게 부모로부터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가장 소중한 대상으로 여겨져서 충분한 사랑을 받고,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기에 의지할 수 있고, 또 외롭거나 슬플 때는 그 대상으로부터 위로받는 등의 애정 욕구와 의존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욕구가 채워짐으로써 우리의 정서가 안정되고 건강하게 발달되기 때문이죠.
이런 욕구들이 필요한 시기에 잘 채워지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을 어린아이지만 직감적으로 알아채고,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적이고 의젓한 아이처럼 비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겉모습이나 행동과는 달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의 중요한 욕구가 의존 대상으로부터 채워지지 못했다는 ‘결핍감’이 자리하게 되고, 성장 과정에서 혹은 성인이 된 이후로도 이것을 중요한 대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채우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허구의 독립’이라는 개념인데요, 사연자님께서 적어 주신 성장 과정과 지금의 마음 상태를 잘 살펴보면 사연자님께 이 ‘허구의 독립’의 면모가 엿보인다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적어 주신 사연글로 추측해 보건대, 성장 과정에서 집안 분위기는 언제 부모님들 간에 싸움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당히 불안정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부모님께 응석을 부리거나 마음 편히 의지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테고, 사연자님께서는 부모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 오셨겠지요. 때로는 부모님께 힘들다고 투정도 부리고 싶고 나의 힘들고 외로운 마음을 알아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런 마음을 쉽게 꺼내 놓을 수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 사연자님은 묵묵히 자기의 일을 알아서 잘 하는 아이, 손이 잘 안 가는 아이, 어른스러운 아이가 아니셨는지요.
사연자님께서는 누군가에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눈물부터 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아마도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 그 이후에 혼자서는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무력감 같은 감정이 밀려오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누구에게도 기댈 곳 없던 사연자님의 어린 시절, 그 상처받은 아이의 무력감과 외로움, 부모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 슬픔들이 건드려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없이 작고 작은 아이가 불안하고 주눅 들게 만들던 집안의 무거운 공기를, 부모님 두 분의 사이가 틀어지고 이혼이라는 결말을 맺기까지 가정에 맴돌던 냉기를 그대로 견뎌야 했던 그 아이의 마음이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작고 여린 아이이기에, 또 비록 부모 자신들의 문제로 힘들고 수습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고, 자녀들을 책임지려 했던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마냥 부모님을 미워하거나 탓할 수만도 없던 그 아이는 얼마나 혼란스럽고 또 답답했을까요.
그런 마음들을 지금껏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위로받지도 못한 채 사연자님의 가슴 깊은 곳에 쌓이고 쌓여서 비록 사연자님께서 혼자서 앞가림을 하고 홀로서기를 해야 할 나이가 되었지만,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고, 부모님 앞에서는 마냥 어린아이처럼 사랑받고 수용받고 싶은 마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아닐는지요.
이제부터는 사연자님의 마음속에서 울고 있는 작고 여린 ‘상처받은 아이’를 알아주고, 따뜻하게 안아 주고, 곁에서 기댈 수 있게 해 주고, 위로해 주는 시간들을 가져 보세요. 먼저, 사연자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감정들과 혼란스러움이 부적절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간 사연자님께서 지나온 시간들을 비쳐 볼 때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부터 시작해 보셨으면 합니다.
사연자님의 내면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방법을 이 글에서 추천해 드리겠지만, 그 과정이 힘들고 또 시간이 걸리는 작업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고민과 상담글을 신청해 오신 것만으로도 이미 치유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시중에는 ‘상처받은 내면아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며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되실 때,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학지사), 『나를 꽃피우는 치유 심리학』(침묵의향기),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푸른향기)와 같은 책들을 한번 탐독해 보시기를 권유드려요.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사연자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따라 들어가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스스로 보듬어 주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또 아직 부모님께서 곁에 계신 시간 동안, 어릴 때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힘들고 속상하고 불안하고 아팠던 마음들을 한 번쯤 담담히 털어놓아 보세요. 만약 부모님께서 사연자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또 위로해 주신다면 사연자님의 마음속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이제라도 눈물을 그치는 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부모님께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라 ‘당시에는 나도 힘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처럼 사연자님의 마음을 잘 알아주지 못하는 반응이 나오더라도 괜찮습니다. 이제라도 사연자님의 마음을 부모님께 솔직하게 표현해 보았던 그 용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이제 사연자님은 더 이상 작고 무력한 아이가 아니며, 부모님뿐만 아니라 앞으로 사연자님께서 맺게 될 중요한 관계(연인, 결혼 후라면 남편이나 자녀 등)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행위 속에서 얼마든지 안정적이고 치유가 되는 관계를 맺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그 이전에 가능하다면 부모님과 좀 더 속 깊은 대화와 좋은 시간을 가지는 기회를 마련하실 것을 추천드리며,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사연자님께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와 내면의 탐색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정감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해 보신다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떠오르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일기로 써 보시는 것도 괜찮고요.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이 너무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진다면, 처음에는 전문 상담가나 정신건강 전문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연자님께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연자님의 현재 모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철이 없지도 않고, 바보 같지도 않고요.
너무 일찍 철이 들고 어른이 되었던 아이가, 이제는 어른이 되어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어린아이의 마음을 조금 알아달라고 외치는 것뿐이에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이제라도 그 외침에 어떻게 응답해 줄 수 있을지,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으로 그 아이에게 달려가 보신다면 좋겠습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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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