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50대 중년 남성입니다. 부모에게 그동안 받았던 학대와 이용, 착취의 트라우마가 반백 년 살아온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혼전임신으로 아버지가 19살 때 태어났으며, 저를 낳아 준 어머니는 도망가셨습니다. 아버지는 20대 중반에 다른 여성분과 결혼하셨고 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와 살았습니다. 당시 친부와 계모는 저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고 초등학교 시절 책 한 권, 공책 한 권 사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준비물을 가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선생님께 혼나거나 맞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준비물을 사야 하니 100원만 달라고 부모님 댁을 찾을 때면 매번 문전박대당했고, 학교 가서 선생님에게 혼날 생각에 준비물이 있는 날이면 매번 울면서 학교에 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친부 및 계모와 함께 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예 같은 학대, 이용, 착취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집에 오면 인형 눈알 붙이는 일을 해야 했고, 구타와 정서적 학대가 계속되었습니다. 방과 후 집에 가기가 휴가 후 복귀하는 군인처럼 싫었습니다.

가출도 해 봤지만 엄청난 구타만 돌아왔습니다. 어찌어찌 실업계고를 졸업하고 전문대를 다녔는데, 재학 중에도 밤부터 새벽까지 집에서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일에 학업에는 당연히 소홀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당시 계모가 낳은 아이는 소중한지 선생님을 붙여서 과외를 시키더군요. 저도 미래에 대한 고민이 생겨 가게에서 도망 나와 공부를 했습니다. 

독하게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해 학비를 스스로 벌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졸업 후에는 공무원에 입직하여 공무원 배우자도 만나고 되었고요. 이때부터 부모님이 갑자기 친밀 모드로 전환되었습니다. 아이가 생겨서 그래도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적지 않은 비용을 드리면서 아이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이를 볼모로 한 엄청난 가스라이팅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직장 생활하는 와이프가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고, 시부모로 인해 이혼 위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금은 저와 배우자 모두 관리직 공무원으로 남부럽지 않은 명예를 갖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15살 많은 계모와 친부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차를 바꿔 달라는 요구, 부동산을 공동투자해서 대출 원리금은 제가 갚고 임대수익은 부모님 생활비로 쓰겠다는 요구에 이제는 부양 요구까지 하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학대와 이용, 착취, 특히 자식이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할 학창 시절에 노동을 강요하던 분들이 이제는 제가 자력으로 작은 성공을 이루었다고 빨대를 꽂으려 하시는 행태가 너무나 얄밉고 뻔뻔해 보입니다. 너무 밉습니다. 부모님과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아 지금은 연락을 끊고 있습니다. 연락을 끊고 나서는 마음의 평온함을 일부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 연락을 끊고 사는 것이 적절한지 문의드립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 신체적 학대와 착취를 했던 부모님이 사연자님이 중년이 된 지금은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이용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점으로 인해 고민이 많으시군요. 다행히 지금은 부모님과 연락을 끊고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셨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혼란함도 함께 느끼시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우선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물리적, 정서적, 경제적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력으로 현재의 자리에 오르신 사연자님께 참 수고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공부하시고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리시고,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현재의 삶을 일구어 내신 사연자님은 참 많은 내적 자원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의 시간이 있으셨을까 싶습니다. 

출생이나 입양 등을 통해 태어난 이후부터 계속 소속되어 자라는 가정을 ‘원가족(family of origin)’이라고 합니다. 원가족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누가 내 부모가 될 것인지, 어느 나라나 지역에서 태어날 것인지, 내 형제자매가 누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원가족은 완벽하거나 온전하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운 좋게 화목하고 윤택한 가정환경 속에 태어난다면 다행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가족 안에 갈등이 있는 경우, 심하면 학대와 트라우마적 경험을 반복적으로 제공하는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고 외부로부터의 도움 없이 자립이 불가능한 아이들은 원가족의 환경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다른 선택의 여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연자님의 경우 다행히 할머니께서 생존하신 동안에는 친부, 계모로부터 분리되어 생활할 수 있었지만,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다시 원가족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셨던 것이지요.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원가족 안에서 성장한 우리는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며 새로운 가족을 꾸립니다. 물론 가족을 만들지 않고 미혼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만, 점차 원가족과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혼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경우에는 원가족으로부터 새롭게 만든 가정으로 초점이 옮겨지면서 삶의 무게중심이 바뀌게 됩니다. 배우자를 만나 새롭게 꾸린 가정은 원가족과는 달리 ‘나의 선택’으로 형성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부모와 형제자매를 선택할 수 없었던 것과는 다르게 내가 고른 배우자와 평생 함께 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으로서 혼인 관계를 통해 맺어진 새로운 가족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 역시 그만큼 무겁고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사연자님께서는 열심히 노력하시고 성실하게 삶을 살아오신 덕분에 직업적, 경제적 안정도 어느 정도 갖추셨고 결혼으로 꾸리신 새로운 가족과의 삶에도 충실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가족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경제적 부담과 간섭이 새로운 가족관계에서 지속적인 위협요인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새로운 가족 내에서도 물론 때에 따라 배우자나 자녀와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연에 남겨 주신 내용으로 봤을 때 사연자님이 현재 배우자나 자녀분들과 직접적인 갈등 요인이 있었다기보다는 친부, 계모와의 관계로 인한 갈등 상황이 대부분이었고, 그것이 이혼 위기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작용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도 부모님과의 관계가 본인 및 배우자, 자녀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계시기에 현재 연락을 끊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과거에는 부모님이 사연자님만을 힘들게 했지만 지금은 사연자님의 가정 전체를 힘들게 하는 존재임을 알기에 자녀로서 잘못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부담을 안고서라도 연락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을 하고 계신 것일 테지요. 

분명 부모님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연락을 끊는 것이 잘못된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편에 불편함과 미안함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 미안함이나 죄스러운 마음을 느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미 사연자님께서는 지금까지 자녀로서 충분히 역할을 다하셨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로서 부모에게 당연히 받아야 할 최소한의 지원이나 지지도 받지 못했음에도 사연자님은 훌륭하게 성장하셨고, 그런 부모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자녀 양육에 대한 비용을 비롯해 해야 할 도리를 충분히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주고, 자녀는 다시 그 사랑을 그 자녀에게 흘려보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자녀로서 받아야 하는 ‘내리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부모님께 일방적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니 부모님께 혹시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부담이나 걱정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셔도 좋겠습니다.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부모 자녀 관계도 어느 정도 ‘상호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주지 않거나 역할을 다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또, 사연자님의 경우처럼 부모가 오히려 자녀를 이용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결핍으로 오히려 부모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인정받으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사연자님께 정말 중요한 가족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친부와 계모로 이루어진 원가족이 아닌, 사연자님의 배우자분과 자녀분들일 것입니다. 사연자님뿐만 아니라 가족분들을 위해서라도 부모님의 무리한 요구나 심리적, 경제적 간섭을 차단하시고 독립된 가정으로서 가정의 안정을 지키시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처럼 연락을 끊고 지내실 수도 있고, 혹은 중요한 절기나 기념일 정도에만 연락을 드리면서 경제적, 심리적으로 침범하시거나 사연자님께 부담이 되는 무리한 요구를 하실 수 없도록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부모님께서 사연자님께 무작정 요구하면 다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않도록 말입니다. 

사연자님은 이제 더 이상 준비물이 없어 울던 아이도, 학창 시절 공부 대신 가게 일을 밤새도록 도와야 했던 청년도 아닙니다. 충분히 사연자님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힘이 있는 분입니다. 사연자님의 삶과 현재의 가정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부모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경계를 만들어 가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수면센터
대한민국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 이사, 사무총장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자문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감사자문위원회 위원
교육청 학교폭력대책 심의위원회 위원
생명존중정책민관협의회 위원, 산림청 산림치유포럼 이사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연주를 듣는 것 같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도움 받고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어요."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