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마음이 답답하거나 잠시 쉼이 필요할 때, 여러분은 어떤 곳을 찾으시나요? 각자의 선호나 취향에 따라 산이나 바다, 미술관, 노래방, 영화관 등 다양한 장소나 공간을 찾을 것입니다. 생각을 환기시켜 주고 마음을 안정되게 해주는 아지트 같은 곳 말입니다. 그중 쉽게 접근 및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원’과 ‘벤치’가 아닐까 합니다.
집 근처 공원이나 길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서 잠깐 쉬는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생각을 정리하고 여유를 즐깁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바쁜 일상에 지친 뇌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지요.
혼자 공원이나 벤치를 찾을 때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편하게 눕거나 앉아서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이완합니다. 때로는 나란히 앉은 낯선 이와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사람, 반려동물과 함께 할 때면 벤치에 앉아 친밀하고 사적인 대화를 하기도 하고, 공원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피크닉을 즐기기도 합니다. 이렇게 공원과 벤치는 많은 이들에게 개인적인 성찰과 사회적 관계 및 유대감 형성을 위한 자원이 됩니다.
특히 공원이나 벤치는 입장이나 사용에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공공재의 성격을 띠며,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건축가 유현준씨는 한 방송을 통해 이런 공원과 벤치의 공공성을 강조하면서 외국에 비해 서울에 유난히 벤치 수가 적으며, 공원 간 거리가 상당해 사람들의 공원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공원과 벤치는 무료로 사용 가능한 휴식 공간인데 이런 공간이 부족하다 보니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카페를 찾게 되고,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갈 수 있는 카페나 공간의 종류가 달라지면서 소득 격차가 공간 사용에도 반영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럽을 비롯한 외국의 경우 거리 곳곳에 벤치나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간식을 먹으며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고,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조금이라도 햇빛이 비치는 날에는 모두 공원에 나와 벌러덩 누워 일광욕하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높은 집값과 물가로 유명한 미국 뉴욕의 한복판에도 약 103만 평에 달하는 센트럴파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울 올림픽 공원의 2.35배에 달하는 크기라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센트럴파크의 경관 설계자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는 1859년 센트럴파크 설명문(Description of the Central Park)에서 공원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젊은이와 노인, 포악한 사람과 고결한 사람 모두에게 건강한 오락을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는 조경 설계를 단순히 미학적 관점을 넘어서 사회문제를 해결 및 개선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도시 공원 조성을 통해 도시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사회 변화 및 민주주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의 이런 철학에 따라 조성된 센트럴파크는 16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뉴욕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으며, 연간 3,5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 명소이자 뉴욕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뉴욕 시민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 온 누구에게든 문을 열고 품을 내주는 센트럴파크의 현재 모습은 옴스테드가 꿈꾸던 공원의 가치 및 사회 변화를 실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넓은 녹지 공간과 곳곳에 자리 잡은 벤치에는 수많은 사람의 사연과 추억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가족을 그리며, 또는 사랑하는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며 벤치에 애도나 축하의 문구를 새기기도 하고, 그 벤치를 찾는 또 다른 낯선 이는 그 문구를 보며 자신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같은 마음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혼자 찾은 벤치나 공원에서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경험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찾은 날에는 그들과 나란히 걷거나 앉아 발을 맞추고, 마음을 맞추는 경험을 합니다.
공원에서는 가난한 이, 부자, 많이 배운 사람, 적게 배운 사람, 나이 많은 사람, 어린 사람, 그 누구나 평등해집니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온전히 현재를 즐길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벤치와 공원이 갖는 문화적, 상징적 힘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공원 및 벤치 조성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8월에는 광화문광장이 새 단장을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차도의 폭을 줄이는 대신 시민들이 자유롭게 걷고 쉬어갈 수 있는 공원과 광장을 확장하고, 곳곳에 벤치도 설치해 두었습니다. 서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을 이렇게 시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적이고 문화적인 장소로 탈바꿈하도록 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예전에 비해 곳곳에 공원과 녹지 공간을 조성하고 조경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택가 인근 근린공원이나 아파트단지 내의 조경시설, 빌딩이나 사무실 밀집 지역의 옥상정원 설치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활동이 제한되고 실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 친화적이고 공공재의 성격을 띠는 휴식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도 이런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쉬어 갈 수 있는 곳, 소득이나 지위의 구분 없이 즐길 수 있는 공간 자원으로서 벤치와 공원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이런 긍정적인 변화가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일상에서의 쉼이 필요할 때, 잠시 주변의 공원이나 벤치에서 쉬어 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숲, 독서, 명상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